여행과 사진

[ 영동 ] 금성산에 올라

재넘어아재 2018. 8. 25. 05:32




[ 영동 ] 금성산에 오르다


< 2018. 7. 14.~7. 15. >


이번의 여행은 두 처제네가 사는 영동이다.

그 두 가족의 아랫 동서와 막네처제의 생월(물론생일은 틀림)이 같다.


생일이 빠른 아랫동서는 회갑을 기념하여

아들이 사는 캐나다여행을 다녀온 직후에 이번 가족모임을 주도했다.


자기들만 살짝 다녀온 것이 조금 겸연쩍었던 것 같다.

한편, 막내처네제는 작년에 아들장가를 보냈는데...


대전에 사는 그 아들내외가 이번 모임 사실을 알고

모두를 대전으로 초대하였단다.


- 7. 14. 토요일 -


하여 생일부근의 토요일을 택해

세 밤실댁들은 배우자를 동반하여 영동의 어느 고깃집에 모였다.


그날 두 동서네 각자의 생업을 중지하고

우리까지 포함해 세 가족이 캐나다로 여행을 가자던가 뭐라던가...

그런 토론이 있었던 것 같은데


벌써 한 달도 더 경과해서 일까

그때 얘기가 어찌결정됐는지 지금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때 축하주라는 사유로 마음놓고 마셨을까

아니 술에 취해 정신이 나갔었나.




- 7. 15. 일요일 -


처제네에서 잤었나보다.

처제 내외는 결혼 후부터 영동에 살면서


처가를 수시로 드나들었고

어느식구보다 장인 장모님을 많이 도와주었다.


처가에는 처남 둘이 있으나 외지에 살기에

어떤 면에서는 처제가 처가행사를 주도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여튼 그날 새벽,

그 처제네에서 잠을 깨었다가 다시 눈 부치려했으나

여느날 처럼 정신만 말똥거렸다.


죽향골 같으면 인터넷을 할텐데 그러지도 못할 형편이고

잠든사람들을 깨울까 싶어 TV마저 켜지 못 할 처지였다.


별 수없이 산책이나 하려고 밖을 나선다.

능소화가 활짝핀 아침 풍경이 좋지 아니한가



옛 영동농고(영동산업과학고?)운동장이 보인다.

아직 이른새벽이어서 운동하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부용리는 1960년대말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 기거하던 마을,

군청에 다니는 매형이 누님과 살던 곳이였다.


당시 나는 영동에서 30여리 떨어진 신항리에서

읍내중학교로 진학하면서 부모님과 떨어져 읍내에 기거하였다.

물론 주말에는 고향행...


호롱불 아래에서 살다 눈부신 전깃불이 있는 도시여서일까

아니면 호기심 많은 시골아이여서일까


부용리에 대한 추억은 상상 이상이었나 보다.

하여튼 반세기 전의 살던 그 곳이 지금도 그립고


혹여, 그때의 친구나 마을사람들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시간이 나면 한바퀴 돌아보곤 한다.


물론 지금 껏 몇 번을 다녀 봤어도

너무변해 그때 그곳은 짐작만 가고 사람들 역시 만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산책길에 만나는 식물을 보는 것 만으로도 좋다.



학교 뒷편 길에서 등산안내도를 보고

갑자기 등산로에 접어 들었으며 벌써 한참 올라왔다.



예전에는 없었던 것 같은 연못이...

안내도에 보여서 새로 생겼을 거라 생각했으나

잠시후 발견한 것은 둠벙 같았다.


아무래도 연못은 아닌 것 같아 주변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 높은 곳에 이런 것이 있다니 신기했다.



예전의 부용리 뒷산은 묘지가 많았던 기억이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 묘지들을 발견할 수 없었는데

아마도 그런곳을 피해 등산로를 개척하였지 싶다.


등산로 양쪽엔 큰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서 터널을 이뤘기에

묘지들이 보이지 않을지 모르겠다.


일부 수풀 구간도 보여서 산책이 흥미롭다.

요즘 잘 보이지 않는 꿀풀의 흔적이 보여 더 좋았다.



요즘은 묘지를 후손들이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나무들이 뻗어 어느새 숲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때 온 국토가 묘지화 된다고 하여

언론에서 난리를 치고 규제를 부르짓곤 한 것같은데...


아마도 지금추세로 보아선 많은 묘지들을 방치될 것이고

머지않아 결국은 숲으로 돌아갈 것이라 예상한다.




예전의 이곳은 큰 나무들은 거의 없는 벌거숭이였고

묘지나 밭들이 있었다.


결국 잔디가 있는 곳에 머물며 꽃을 구경할 수 있었다.

봄에 오르면 할미꽃을 구경할 듯하네...



물론 시계꽃이라 부르던 토종 패랭이가

이 가뭄에도 흔하다.



언제 쯤 능선에 닿아 시내가 보일까 기대했었는데...

잠시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곳을 지난다.



예전(50년전)에는 삼 층이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일반 주택은 대부분 단층이었다.


로타리쪽의 건물을 비롯해

시장의 상가들, 관청들 역시 일층이 가장 많았고


새로짓는 건물만 2층으로 올려졌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는 모습이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부터

영동읍이 곧 시로 승격될 것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도 읍으로 유지되는 것을 보면

여느 지방처럼 인구가 늘지 않는 것이 원인 인 듯하다.



그나저나 등산로가 이처럼 훌륭한데

도무지 사람을 구경할 수 없다는 것이 의외이다.



안내도를 보니 서낭당을 지나고 있나 보다.

여기서 곧장 내려가면 예전에 살던 그 마을이다.



약도에서 가장 높은 곳일 것 같은 금성산 정상에 이끌린다.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올라봐야지....암~,


지금도 자고 있을 사람들에게 말할 게 있잖아...

그래서 땀을 흘리며 계단을 오른다.



지금의 읍내사람들은 금성산을 잘 알겠지만...

에전에는 못들어 본 이름이다.




등산로엔 이따끔 쉬어 갈 수 있게

쉼터가 조성돼 있고 좋은 시까지 읽을 수 있었다.



잠시 후이면 정상일 듯,

능선엔 근래에 심긴 듯한 소나무들이 보인다.



정상에 도착한 시각이 6시 8분,

출발 후 50분 쯤 걸린 셈이다.



일출을 기대했으나 이미 지났거나...

구름까지 꼈는가 하면 동편은 나무가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읍내의 도심이 어느정도 보여서 다행스럽다.



도시 같으면 저런 운동기구나 정자엔 사람이 있을 법한데...

새벽 이어서 일까 눈을 씻고 봐도 그림자 조차 없다.



정자가 심심해 할 것 같아

잠시 올라가 사방을 내려다 본다.



예전에 성당과 향교가 있던 곳을 향한 길,

눈에 익은 흰 꽃이 반긴다.



의외로 복잡한 금성산 등산안내도

0.7킬로미터 거리의 영동향교 쪽를 택했다.


예전 향교 앞에는 아주 커다란 운행나무가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본 읍내의 나무 중에 제일 컷지 싶다.


몰론 그 보다 더 큰나무는

지금은 폐교된 용산초등학교의 플러터너스였지싶네...



미송 사이로 조성된 산책 길...

휴대폰 내장카메라가 요즘 이상하게 눈부심 현상이 발생한다.



특히 어두운 곳에서 하늘을 보면

그런 증상이 더 깊어져 사진의 질을 현저히 저하시킨다.ㅜㅜ



이따끔 저절로 꺼졌다 켜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열이 발생하기도 해서 서비스센터를 찾았으나


기사가 하는 말이 수많은 부품으로 이루어진 핸드폰을

오래 사용하였다는 것으로...


이와 같은 증상이 발생하면 내부 회로판을 교체해야 하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낡은 것에 비용을 들이기 보다는

새 것으로 교환하는 것이 너 나을 것 같단다.


청소하고 다시포맷하였으나

같은 증세가 다시찾아 올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자기 같으면 그때까지 사용을 하다가

기회를 봐서 기계를 바꾸겠다며 설명을 해줬었다.


하여튼, 요즘은 사진이 뿌여지는 현상이 발생하지만

이 낡은 핸드폰이 버텨 주었으면 좋겠다.



경부선 기찻길이나 국도를 보아선

읍내에서의 남쪽은 황간이나 추풍령 그리고 김천 일 것 같게 느껴진다.


나는 중학교 다닐 때 읍내에서 보아 용산이 동쪽이고

심천이 북쪽이며 양강이 서쪽이라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실제 지도를 보아선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

용산이 북쪽이고 황간이나 추풍령이 동편이다.



그러고 보면 사진 좌측이 동쪽이고 우측이 남쪽인 셈이다.

또한 영동읍내 로타리에서


영동역까지의 방향을 이으면

김천 쪽이 아니라 상촌, 용화쪽에 닿는 것이다.



이제는 제법 향교 가까이로 내려왔다.



저쪽에 금성사란 절이 있는 것 같은데...

그곳을 보니 고가도로 같은 것이 보인다.




눈 앞에 있는 보랏빛 나팔꽃을 보며



더 아래로 내려가는 오솔길

양편에 대나무들이 자라고 있어서 잠시 대밭에 온 듯하였다.



향교 옆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없던 건물이다.



그 주변에는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사진의 길이 예전의 그 길인듯하여 내려갔으나


막다른 곳의 개인주택이어서

겸연쩍어하며 되돌아 나와야 했다.



예전의 향교는 고풍스런 기와집이었는데...

그옆에 다른 시설을 지었을까, 다소 생뚱맞게 보인다.



향교 아래에 성당이 있었는데...

그런 것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라 한다.


하여튼 이쯤 어디에서 내가 기거하던

누님댁을 갈 수 있는 좁은 언덕길이 있었는데 저곳으로 가면 보일까




예전보다 집들도 더 들어섰고

주변에 있던 작은 밭들과 나무들이 사라진 것 같다.



그렇더라도 우측으로 내려가면

개울옆에 차량이 다닐수 있는 큰 길이 나오리라



이 주변에 자주 놀러가던 그 집 부근같다.

같은 반 만규와 즐겨 찾던 집


그 집엔 대여섯 살 더 많은 형이 있었고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함께 살았던 것 같다.


사실 부용리의 그형은 구면인데

여름철엔 커다란 짐자전거에 아이스케키통을 싣고


읍내에서 비포장 솔티재를 넘어 다니며

용산의 이마을 저마을로 다니면서 '아이스케키'를 외쳤다.


하여튼 날씨가 서늘해지면 아이스케키 영업을 멈추고

그집에서 설탕 넣은 주전자를 연탄화덕에 올려놓기 시작한다.


주전자속의 설탕은 차츰 꿀처럼 녹게 되고 너무 녹으면 맛이 쓰므로

적당한 때에 금속제 형틀에 부어 굳힌다.


손잡이가 달린 수탉 등 동물모양이 주류였는데...

각가지 모양의 설탕과자를 만들었다.


손잡이래야 나무젓가락을 찢어 과자 가운데 꼽아 굳힌 것으로

손에 쥐고 빨아먹는 구조의 과자였다.


하여튼 그 과자를 만드는 동안 발생하는

불량품을 마음껏 먹을수 있었는데 그 재미로 갔던 기억이다.


점방(가게)마다 설탕과자는 비닐봉지에 싸여

고무밴드에 묶여 진열돼 있었다. 지금에서 생각하면 불량식품인데...ㅋ


하여튼, 누구보다 부지런한 그형은 지금 어디선가

남부럽지 않게 살고 계실 것 같다.



집들이 많이 변화돼 정확하진 않지만...

예전에 똘똘이네가 살던 집인 것 같은데...

아무도 뵈지 않는다.



간신히 출발한 지점(옛 농고 뒷편)에 도착....



출발할 때 본 능소화가 더 밝게 빛난다.



세가족이 점심때 도착한 곳은 대전 둔산동의 어느 한식집

거기서 맛있게 식사를 하였고



끝으로 막내처제의 생일을 기념하는

케익이 잘라졌다. 생일축하해~~^^



그후 연산의 요양원을 찾아 장인어른을 뵈었다.

장모님은 약간의 의식이 있으나


전혀 알아보지 못하기에 서로 애만 탄다는 조언에

차마 대면하지 못해 죄스럽고 애달픈 그런 귀향길이었다.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