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

[ 안성 ] 조병화 문학관을 찾아서 (하편) - 당진도서관 문학기행 -

재넘어아재 2018. 6. 11. 10:57



[ 안성 ] 편운 조병화문학관 기행 (하편)

< 2018. 4. 10. >


지난 상편에 이은 후속편의 시작,

조병화문학관 제1전시실 출입구의 "꿈" 이란 단어 앞에서부터.~



다음 단계로 이동하는 것이 아쉬웠을까

신나게 설명하는 해설사와 진지하게 듣는 일행들 모습이다.



아마도 이 시에 대해 설명한 듯하다.

나는 아까 찍었구만...담배 파이프 그림이 구수해서리...ㅎ



이제 안내도의 2번을 떠나 4, 5번 건물로 이동한단다.



저 때의 시각이 10시 56분



아직 잔디가 누렇지만...

그 위엔 연 노란 꽃다지가 꽃 피우고 있는 게 보였다.

뒤돌아선 아내는 나를 기다리고...




잠시후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벚꽃이 보였고

그 아래쪽으로 시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라 한다.


시인의 어머니는 본처가 아니었기에

사후 그의 아버지 옆에 묻히지 못하였나 보다.


사실 아버지 세대 때 재력이 받혀주는 남자의 경우

첩을 얻는 경우가 있었는데


조병화 시인이 그런 어머니로부터 탄생되었고

큰어머니 슬하에서 자라고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게다.


때문에 그의 친어머니를 가엾게 여겼고

그애 대한 애환이 시인을 편생 따라다닌 듯 하다.



오줌싼 아이가 키 쓴 모습의 조각



이정우 선생으로무터 편운재 입구까지 시인의 가족사에 대해

그리고 어릴적의 얘기 등을 들으며 걸었다.



선친의 묘소는 합장묘 같은데....

그의 친모가 죽어서까지 옆에 묻히지 못한 것을

애통해 하였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얼핏 파주 소령원이 생각났다.

한때 TV연속극에 나왔던 "동이"의 묘가 바로 소령원이다.


파주 소령원(坡州 昭寧園)은 조선 21대 영조(재위 1724∼1776)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묘인데


영조는 자기를 낳은 어머니의 묘가

왕비가 아니라하여 능으로 부르지 못하고 숙빈묘라 함을 안타깝게 여겨

재임 중에 소령묘라 고쳤으며


1753년(영조 29년) 왕의 사친추존제도를 성립한 후에는

다시 소령원으로 격상하였다고 한다.



양짓쪽엔 잔디를 비롯한 잡초들이 깨어나

움도 트고 꽃을 피우는 모습이다.



그 아기와 엄마의 모습아닐까.



잘 정돈된 편운재 입구 길 옆

진분홍 금낭화가 복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기 시작했다.


시인은 편운재를 지으면서 글을 남겼으리라.


당신 곁, 솔나무 밭, 낮은 언덕

당신을 수시로 뵐 수 있는 자리 골라서

당신의 묘막 깍아서 세웠습니다.


남향으로 멀리 천덕산 산마루 오른쪽 서편엔

아버지 할아버지 왼쪽 동편엔 떨어져서 당신이 계시옵는 자리 중 가운데


당신을 지키옵는 창문 밤이면 밝히는 등피

낮이면 여는 창문 한가로이 당신과 같이하는 이 자리


청청한 별, 우물에 괴고

너구리, 산토끼 들러서 가는 온 밤 중 방에 누우면


당신의 손목 이름하여 편운재 조각 구름의 집

당신을 위하여 당신 곁에 당신을 수시로 뵐 수 있는 자리 골라서

돌 모아 세웠습니다.


한 세상 조각 구름 둥둥 먼 하늘 지면 그뿐,

당신 곁에 창을 마련했습니다.



편운재는 그가 어머니를 위하여 지은 묘막으로

"조각구름의 집"이란 의미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이듬해인 1963년 착공하여

1964년 준공된 편운재의 벽에는 그가 일생동안 깊이 새겼던 어머님의 말씀


" 살은 죽으면 썩는다"를 새겨 놓아

조병화 시인의 지극한 효심을 볼 수 있는 집이다.



편운재 옆에는 청와헌이 있는데

창을 열면 개구리 소리가 들린다는 뜻의 이름이 붙혀진 건축물이다.


조병화 시인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그리며,

정년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집으로 가끔씩 집필을 하거나

휴식을 하였던 공간이라 한다.




훈장을 받고 씩은 그의 사진 앞에 섰다.

1996년 금관문화훈장을 받고서 이를 기념하였던 사진 같다.


시인은 아세아문학상(1957), 한국시인협회상(1974), 서울시문화상(1981),

대한민국예술원상(1985), 31문화상(1990), 대한민국문학대상(1992),


대한민국금관문화훈장(1996), 516민족상(1997)

그리고 세계시인대회에서 여러 상과 감사패를 받았다.


그는 이러한 상금과 원고료를 모아 후배 문인들의 창작활동을 돕기 위해

1991년 편운문학상(片雲文學賞)을 제정했고,


현재까지 시인, 평론가들과 시문화단체에게 이 상을 수여했단다.

이후 유족들이 그의 유지를 받들어


지속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소요 비용 때문에도 문학관 입장료가 있을성 싶기도 하다.



시인을 추모하는 문인들의 서화가 붙어 있었다.



그가 머물려 시를 쓰던 곳일까.

이따끔 그림도 그리고 담소하던 그런 작은 방도 있었다.



개구리의 명상 - 5


초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밤하늘을 무논에서 목청껏

세상 모르고 울어대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나는 텅 비어가면서 눈물이 돕니다.


어쩌면 저렇게도 순진한 울음소리가 있으리

하늘의 목소리 다하여 밤새워 온 천지를 진동시키는구나


나의 슬픔은 그곳에 숨어 있는 거

, 순수 무구한 무상의 희열이여 생명을 가진 자들의 오열이여


어머님, 지금 어머님 묘소 앞 무논에서

천진무구한 개구리들이 세상 모르고 부처님이 주신 목소리 다하여


유구한 세월, 이 한 순간을

목청껏 울어대고 있습니다.


-1993. 6. 20 청와헌에서-



개구리의 명상 -10


어머님이 내 마음 좁은 안방으로 들어오시면

돌연, 내 마음 좁은 안방은 환하게 넓어진다.


환하게 넓어지면서, 나는 그 환하게 넓어진 방 안에서

칠십이 넘은 철없는 아이가 된다.


, 어머님은 나의 평화, 나의 자유,

눈물 많은 나의 행복, 훤히 넓어지는 충만한 공간,

언제나 그곳에 아늑히 계시며 나는 순수 무구한 아이가 된다.


회갑을 넘어도, 고희를 넘어도,

세월을 넘어도, 외로운 이 좁은 내 마음,


어머님이 내마음 좁은 방으로 들어오시면

돌연, 내 이 좁은 마음의 안방은 환하게, 한없이 한없이 넓어진다. (1993. 6. 1)



청와헌에는 작은 방들이 여러개 있었으며

틈마다 간직하던 물건이나 사진들이 있었다.



흑백사진들이 많았는데 확대해 액자에 넣어

보존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쓰던 물건들도 있지 싶었다.

그럼 물건들을 보면서 고인은 회상하였으리라.



개구리 명상 - 14


가을 잠자리 한 마리가

텅 빈 듯한 고요한 하늘 어디 메에서 날라와선


겁없이 늙은 손등에 살며시 내려앉았다가

또 살며시 어디론지 날아갔습니다.


날아갔다간 무엇을 생각했는지

다시 돌아와 다시 살며시 앉는 것을 보았는데


눈을 떠서 보니 다시

어디로인지 흔적 없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 하니 세상천지에는 나만 남고.

(1993. 9. 24)



추억,

잊어 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



아직 남아있는 일행들을 뒤로 하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주변을 담기 위해서~


저렇게 어머니와 아기가 함께하는 몇개의 조각이 있는데...

그가 생전에 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인은 고향을 찾으면 분명 순박한 감정으로

어릴적 어머니를 그리워했지 싶다.



뜰 앞엔 예쁜 꽃이 어머니를 생각나게 한다.

어쩌면 어머니의 따스한 손 같기도 하고 미소처럼 느꼈으리라.



꿈의 귀향,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그의 묘지 쪽으로 가는 길

산수유가 꽃피고 있었다.



趙炳華 시인, 호는 편운(片雲).

192152일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에서


부친 조두원(蘭有 趙斗元)과 모친 진 종(陳 鍾) 사이

5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미동공립보통학교(渼洞公立普通學校)를 거쳐

19433월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 보통과 및 연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東京高等師範學校) 이과에 입학하여

물리, 화학을 수학하다가 일본 패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459월부터 경성사범학교 물리 교수로 교단생활을 시작하여

인천중학교(仁川中學校, 6년제) 교사, 서울중학교(6년제) 교사로 재직하면서


1949년 제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遺産)>을 출간하여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아울러 중앙대학교, 연세대학교 등에서 시론을 강의하다가

1959년 서울고등학교를 사직하고


경희대학교 교수(시학 교수, 문리대학장, 교육대학원원장 등 역임),

1981년부터 인하대학교 교수(문과대학장, 대학원원장, 부총장 등 역임)로 재직하다

1986831일 정년퇴임했다.


이와 같은 교육과 문학의 업적을 인정받아

중화학술원(中華學術院)에서 명예철학박사,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카나다 빅토리아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펌)



해마다 봄이 되면



해마다 봄이 되면 조병화


어린 시절 어머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 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 해라


해마다 봄이 오면 어린 시전 그 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 해마다 봄이 오면 어린 시절 어머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시인은 52녀 중 막내 였단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에게 더 애틋했지 싶다.



낡아 보이는 건축물...

벽에 능소화 줄기가 감싸고 있어 쉬 상할 것 같다.


서로 얼싸안고 있어 보기엔 좋을지 모르지만

더부살이 처럼 상대에게는 참기 힘든 고통을 주지 싶다.


죽향골 우리집 마당에 있는 편백,

옛주인이 그 나무에 능소화를 올린 나머지 지금은 구렁이 같이 감싸

늙은 편백이 몸살을 하고 있다.


올 가을에는 둘을 분리시키려 하는데

계획데로 잘 되려는지 걱정이다.



괸리인이 문젯점을 간파했을까

능소화 줄기 밑둥을 잘라 놓은 듯하다.



동문으로 가는 길,

그곳엔 예전에 사용하던 펌프가 보였다.


하얀 페인트 칠이 돼 있는데...

일반펌프가 아니라 좀 특수한 모양으로 생겼다.


처갓집 우물터에도 저런 특수한 펌프가 있었는데

부품이 망가져 고칠수가 없다고 들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시간 .

다음에 또 만나용,~


수고하신 문화관광해설사

김정숙 선생님과 그렇게 작별을 하였다.



이내 동문 옆에 닿았고

거기에는 목련이 하얀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동문을 나서 뒤돌아 본다.

편운재, 난실길 4-11




일행들과 버스를 찾아 걷는 중이다.

대치리 갑장 정선생이 "우리 난실리"란 글을 읽고 있다.


우리 난실리 사람들은 잘 살자는 꿈을 먹고 삽니다., ....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도우며, 서로 아끼며...


우리 난실리 고향 사람들은

아름다운 그 꿈을 먹고 삽니다.라고 노래 하였다.




벽화가 그려진 담장 길을 걷는 마님들...

어색한 곳에 귀촌해 사는 그들은 어느새 친구가 되었습니다.




담장 안에는 풀또기가 흰꽃을 터트릴 참이다.

달구어진 냄비 안에서 터지기 시작하는 팝콘처럼..



이제 버스에 올랐다.

문정숙 당진도서관장이 일어나 시집을 소개한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듯한 조 시인의 시집

그리움이 지면 별이 뜨고...

표지가 빛바랜 것을 보면 퍽 오래된 것 같다.




하여튼, 그는 시뿐만 아니라 그림도 겸하여

초대전을 여러 차례 가졌단다.(유화전 8, 시화전 5, 시화-유화전 5회 등)


그의 그림은 그의 시 세계와 흡사하여

아늑한 그리움과 꿈이 형상화된,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고 평가받는다.


그가 그린 그림들을 검색하여 찾았고

여기에 모아 본다.



그렇게 조병화문학관 관람을 마치고

오찬 장소로 이동하였으며


다음의 여정을 다시 이을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에 쓰기로 하면서

- 6월 11일 새벽 -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