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성 ] 너리굴문화마을
- 당진도서관 문학기행 -
< 2018. 4. 10. 화요일 >
오늘 오전 난실리 조병화문학관을 탐방한 다음 버스에 올랐고
일행들과 점심식사를 마친 뒤 서일농원을 찾았으며
농원의 이곳 저곳을 산보하듯 거닐다 잠시 전 버스에 올랐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기행지인 '너리굴마을'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
< 너리굴마을 가는 길 >
서일농원을 떠날 때의 시각이 오후 1시 57분,
농원에서 겨우 40분을 지내다 버스는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정우 선생님은 마이크를 잡으셨고.
40분 가량 이동해 다음 목적지인 너리굴마을에 도착하겠단다.
비봉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너리굴문화마을,
마을 앞에 붙은 '너리굴' 이란 단어는 안성 토박이 말이라 한다.
백두산 천지부터 시작된 산맥이
차령산맥의 끝부분인 비봉산 자락에서 넓은 골짜기가 되었는데
그것을 '너리굴'이라고 표현한 것이란다.
너리굴문화마을은 자연과 예술이 한데 어울려 있는
그런 마을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정우 선생님의 이런저런 말씀하실 때
차창 밖 저멀리 산자락에 하얗게 핀 벚꽃무리가 보인다.
그리고 잠시후 마을 앞 길을 지날 때는
예전 어릴적에 고향에 많던 미루나무(포플라) 한 그루가 보였고,
나는 애써 그 나무를 포착하였다.
늙은 미루나무에 있는 두 개의 까치집까지...
어느날 시골 친구와의 대화를 회상해 본다.
< 그 많던 미루나무가 왜 사라졌나? >
예전에 많던 미루나무가 왜 지금은 없는지 대화를 했었다.
그때 내가 그 친구로부터 들은 새로운 사실,
미루나무는 일반 버드나무와 달리
나무 스스로는 자기 종족을 씨로서 자연번식하질 못한단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가지를 인위적으로 꺾꽂이하여
번식시켰다는 것,
그래서 미루나무는 논둑이나 밭둑
그리고 강변이나 길 가에 인위적으로 심기었나 보다.
그때문에 신작로나 마을 주위에서만 발견될뿐
다른나무들이 자라는 산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게다.
하여튼 젖가락 등이 플라스틱으로 대체되면서
수요가 없어지므로서 결국 도퇴된 것일 거라는 그의 해석이었다.
그래도 나는 예전에 있던 것 몇그루 쯤은
지금 최소한 고향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반문했더니
그 친구는 조목조목 이유를 설명하였다.
미루나무는 속성수이기에 키가 유난히 크기에
그늘을 많이 형성시므로 농작물의 햇빛을 가리는데다
해충을 많이 발생시켜 식량 증산 정책에 지장을 주고,
봄에 꽃가루를 많이 발생시켜
사람들의 건강을 해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는가 하면
늙으면 큰 나무는 태풍 등에 쉽게 쓰러져 위험했고
경제성마저 떨어져 농민들이 기피하는 나무로 전락하였으며,
나머지 마져도 자동적으로 없어진 것으로 생각된단다.
이런 설명을 한 시골의 친구가 존경스럽다.
그런 생각에...글을 쓰는 사이 문화마을에 도착한 것을 보면...
버스는 벌써 40분동안 운행한 것이다.
너리굴문화마을에서 지켜야할 사항들,
시설사용료를 부과한다는 내용을 읽을 때였다.
안내자 왈, 지금 이곳 문화마을은
개장준비를 하는 관계로 영업(정상적인 운영)을 하고 있지 않는다면서,
예정(계획)되었던 탐방은 하지 못한단다.
그렇지만 마을을 둘러 볼 수는 있다고 하면서
기왕에 왔으니 각자 자유롭게 다니다 버스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겼다.
결국, 서일농원에서 처럼 별도의 설명을 듣지 못하고,
각자 둘러 볼 수밖에 없었다.
안내도에는 너리굴 엄마목장을 비롯해
미술관, 동물농장, 입사박물관, 야외공연장, 조각공원 등이 표기돼 있고,
금속공방, 조소공방, 조각공방, 도자기공방들까지 있었으며
다양한 루트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찌 보면 힘들 일상을 떠나고 싶은 시민을 맞는
펜션 보다 큰 규모의 콘도형 마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나 단체가 머물 수 있는 숙소들이 있는가 하면...
너리굴 엄마목장이 유명한 것 같다.
사슴이 살기 좋은 최적의 환경을 지니고 있다는데.
비봉산 정상에서 샘솟는 청정한 약수,
주변의 공장이나 마을, 논밭,과수원, 축사 등과
완벽하게 분리된 공간지형,
질 좋은 사료를 제공해주는 풍부한 야초들과
울창한 나무들이 사슴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듯 보인다.
넓고 푸른 초원을 자연방목 방식으로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사슴들을 보는 것 만으로도
일상에 지친 도시인들에게는 목가적인 풍경의 휴식처이자,
어린이들에게는 자연학습의 장이 되어 줄 게다.
잘 조성되어 있다는 산책로,
우린 그 산책로를 찾아 우리는 가벼운 기분으로 걷기시작했다.
마을 내부를 이곳 저곳을 구경하며
마음 닿는 길로 걸으면 그게 바로 산책로이겠지만
숲 사이에 가르마처럼
마을을 둘러싼 산에 오솔길 산책로가 나있단다.
엄마목장이 끝나는 자락 오른쪽으로 좁은 길이 나온다는데
그곳이 바로 산책로로 들어가는 입구라지만,
우린 거기까지 가지 못하고
잠시 걷다가 도중에 되돌아 나와 버스를 탑승하기로 한다.
하여튼, 주변경관이 뛰어나며
길이 평탄해 힘들이 않는 가벼운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한다.
특히 산 중턱에서 만나게 되는 탁 트인 공간은
안성 시내의 고즈넉한 변두리 풍경을 그림처럼 펼쳐 보여 준단다.
앞서 가는 일행들도 그곳으로 가는 걸까
그런데 무슨 건물부근 데크 길에 우리도 잠시 따라 멈춰섰다.
인부들이 시설들을 단장하느라
대부분의 건물 입구를 막고 탁자며 의자 화분 등을
옮기고 닦고 쓸며 움직임이 부산하다.
그들에 방해될까 눈치가 보이는 정도여서
더 이상 마을 안을 다니기도 그랬다.
그래서 산책을 멈추고 앉아 쉬기로...
마을의 미술관 등 볼거리를 만나길 희망했지만...
나도 별수없이 그들을 따라서 앉아 노닥거렸다.
그렇게 약속된 시각을 기다리다 버스에 올랐고,
버스는 당진 땅을 향해 출발을 하였다.
마이크를 잡은 이정우 선생께서
우리가 함께한 조병화문학관 탐방과 안성지역 기행에 대해
의미를 되새겨 주었으며,
충청도 일원에서 추앙받던
옛 어른이신 사계 김장생 선생에 대한 말씀을 이으셨다.
사계선생이 돈암서원에서 후학들을 가르키면서
하신 말씀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고 이선생님은 강조하셨다.
그 중에 처음 설명돼 기억에 남는 내용이
'지부해함', 땅(대지)은 아무리 크고 무거운 짐이라 할지라도
결코 탓하지 않고 짊어지며,
바다 또한 배척함 없이 모든 물을 수용한다. 라는 말을 해석하시면서
이처럼 땅이 온갖 것을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며 포용하듯
우리가 이를 본 받으면서 살자는 말씀을 하셨다.
이런 말과 함께 논산의 돈암서원,
그중의 숭례사를 둘러싼 꽃담에 새겨진 몇가지 단어를 버스 안에서
설명해 주셨는데 무엇보다도 내 가슴에 와 닿았었다.
그렇지만 지금에 이르러 기행문을 쓰면서
그때 여러 말씀이 아삼삼하여 기록을 남기기 어렵다.
하여, 당진도서관에서 문학기행을 담당하였던
이은태 선생을 통하고 문정숙 도서관장을 경유하여
결국 이정우 선생의 연락처를 입수했고
결국 선생님과 통화하여 내용을 다시 새겨 들게 되었는데
덕분에 내용과 사진까지 검색할 수 있었다.
돈암서원(遯巖書院)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6-14 에 있다.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
사적 제383호이며, 지정 면적은 5590㎥이다.
1634년(인조 12)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창건 이전 연산면에는
김장생의 아버지인 계휘(繼輝)가 설립한 경회당(慶會堂)이 있어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었고,
김장생은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1634년 양성당과 경회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건립하게 되었고,
1660년(현종 1)에 '돈암(遯巖)'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하였다.
1658년(효종 9)에 김집(金集)과 1688년(숙종 14)에 송준길(宋浚吉),
1695년에 송시열(宋時烈)을 각각 추가 배향하였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라고 한다. (펌)
참고, < 조선 후기 약 700개정도 있었는데 서원이 정치세력화되고,
당파 싸움의 온상이 되는 등 부작용이 있자 철폐령이 내려 졌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영주의 소수서원을 비롯해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함양의 남계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장성의 필암서원 대구에 있는 도동서원, 정읍에 있는 무성서원
그리고 논산에 있는 돈암서원 등 이 남아있단다. >
돈암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양성당·응도당(凝道堂)·장판각(藏板閣),
·정회당(靜會堂)·산앙루(山仰樓)·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과
하마비(下馬碑)·송덕비(頌德碑)가 있다.
김장생을 중심으로 김집·송준길·송시열이 배향되어 있는 사우는
면 1칸통(間通)을 개방하여 집채의 앞쪽에
다른 기둥을 세워 만든 조그마한 칸살인 전퇴(前退)를 두었고,
실내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펌) ...( 이하 생략)
돈암서원 안의 숭례사(遯岩書院 崇禮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는
주향(主享)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해마다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지낸단다.
'중정일'이 며칠인지 몰라 사전을 찾았으나 나와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음력 달력에서
매월 정(丁)자가 붙어진 날이 세 번 나오는데...
그 중에 가운데(두번째) 날짜를 중정일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하여튼, 숭례사에는 제향을 지내기 위해 출입하는 내삼문(內三門)은
사당 앞의 어칸과 양협칸을 별도로 하나씩 세우고
문과 문 사이에는 담장이 쳐져 있다고 설명한다.
담장에는 앞서 설명한 「 地負海涵(지부해함)」
대지가 만물을 짊어지고 만천(萬川)을 포용한다.
땅이 온갖 것을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포용하라.
땅처럼 바다처럼 배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
또한 참다운 배움을 익힌 사람은 아집과 편견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땅과 바다처럼 타인의 의견을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두번째로 「 博文約禮(박문약례)」
지식을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배움을 통해 지식을 확장하면서도 자만하지 않고
예에 맞게 언행을 절제할 수 있다면, 참다운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배움의 참뜻을 구현한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과 활용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예법에 맞는 예의 실천을 위한
자기 수양이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 다음이 「 瑞日和風(서일화풍)」
상서로운 해와 구름(햇살과 온화한 바람)과 단비가 만물을 육성하듯이
상대방을 배려하고 응대하면서
지부해함과 박문약례를 실천해 나간다면,
화평하고 조화로운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사계선생의 예학 정신이 담겨져 있다.
사계 김장생과 그의 후손들의 예학정신(禮學精神)을 가
장 잘 보여주는 12개의 글자를 새겨 놓았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아무래도 돈암서원 숭례사를 찾고 싶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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