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

[ 부여 ] 부소산성(扶蘇山城) 이야기

재넘어아재 2016. 4. 18. 05:36




2016년 4월 금천문화원 향토사탐방 (제4편)


- 부여 부소산성(扶餘 扶蘇山城) -


< 2016. 4. 6. >


점심식사를 마치고 구드래조각공원을 산책하였다.

공원엔 벚꽃이 만발하여 어떤 나무는 꽃잎을 하나둘 떨어 지는 것 같다.



버스에 올라 도착한 곳은 부소산성 주차장,

그 곳의 안내도를 보며 산성 길을 오른다.



사적 제5호인 부소산성의 둘레는 2,200m이고

면적은 약 74만㎡ 라 하니 여의도 1/3 정도의 넓이다.



부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휘어 감아 흐르는

백마강에 접해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하여


테뫼식 산성을 1차로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으로서


<삼국사기>에서는 사비성(泗沘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부소산성에 입장하려면 저 산문을 거쳐야 하는데..

입장권을 구입해야 한다는....



몇년전 이곳을 오를땐 폐장 시간이어서

무료로 입장했던 기억이다.


암튼 입장을 했고 1차로 해설사가 기다리는

산성 입구 근처 공터까지 가는 길



안내도에선 공터(광장)이 안보여

선두에서 우왕좌왕 하기도 했다는...


만나기로 한 시각이 지났는데도

우리가 나타나지 않아 해설사가 우리를 찾는 것이 아닐까?


암튼 우리는 해설사 없이 광장까지

억덕 길을 잠시 걸었다.



아까 설명에 나왔던 "테뫼식산성과 포곡식산성,"에 대해

후기를 쓰면서 다시 검색해 봤다.


당진시 면천의 몽산산성에서 보았던 산성에 대한 설명,

그 설명을 다시 찾아 보았으니 참고하자.


높은 산에는 산성, 야트막한 산에는 토성,

평지나 바닷가에는 읍성이 있다.


성곽 시설은 처한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처음에는 간단한 나무기둥을 엮어 세운 목책에서 시작하여,


차츰 흙을 다지거나 깍아 쌓는 토성으로 발전했으며,

그 다음에는 많은 인력으로 석성을 쌓는 단다.


삼국시대의 성곽은 산성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초기에는 주로 낮은 구릉을 이용한 토성을 쌓다가


후기로 갈수록 대규모의 산성으로 바뀌었고

이러한 산성은 형태에 따라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정상 부근에 테를 두른 듯한 테뫼식과

골짜기를 둘러싸는 포곡식으로 구분된단다.(펌)


광장에 도달해 이구헌 해설사를 만났다.

산성의 역사나 부여와 낙화암 등의 설명을 들었다.




이 산성에 있는 낙화암을 비롯한 고란사와

백마강 등의 설명으로 이어졌으며



보통사람들은 부여 낙화암하면 백제 패망시

의자왕의 삼천궁려가 백마강에 투신했다하여 낙화암이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삼쳔궁려'란 삼천명이 아니라

인원이 아주 많았다는 의미라고 강조하여 설명 했다.



이정표를 보니 좌측길로 가야하는 듯...



몇년전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땐

산성 큰 둘레를 한바퀴 걸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못하고


시간상 낙화암과 고란사를거쳐

백마강 유람선을 잠시 탄 뒤 논산으로 떠날 계획이란다.


그런 설명을 하는 중에

인근 나무에서 예쁜 새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가야 할 그 길엔 기념품 가게가 있었고

그 길로 접어드는 커플을 본 가게의 아줌씨는 손님인가 싶어

반갑게 맞이 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잠시뒤 손님인 줄 알았던 커플이

그냥 지나치자 가게 주인은 고개를 떨구는 듯하여

나는 그저 숙연해 했었네...



그렇지만 그들이 지난 언덕길엔

고운 빛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었다.




어르신은 언덕길을 오르느라 땀을 흘렸으나

산보를 하면서 문득 고향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름다운 추억이 떠올려졌을 것 같다.



가랑잎이 두껍게 쌓여 있다.




가랑잎은 썩어 나무 뿌리에 영양을 주고

뿌리는 그 영양을 공급받은 새싹들이 힘차게 자라서

새봄을 유록으로 물들인다.



동면에서 깨어난 다람쥐 우리를 발견했다.



아니 재넘어 아저씨가 먼저 다람쥐를 본 것인가? ㅎ



수줍어 단풍나무 줄기로 숨었다는...



부여에 대하여 기술된 여러 역사서를 살펴보면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남부여, 반도부여, 요동부여, 열도부여 등

총 7가지의 부여가 등장한다고 한다.



부여라는 이름에 특별한 뜻이 있는것은 아니지만

부여가 우리 민족이 세운 고대국가중 무척 강한 나라였으며

그 뿌리에서 여럿이 갈라져 나왔기 때문이라 한다.



우선 가장 먼저 만주지역에 부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동부여는 해부루가 원래 부여에서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생긴 것이고,


북부여는 원래 있던 부여가 남아있으면서..

해모수가 그곳을 통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상고시대는 역사자료가 부족해서

 어떤이유로 도읍을 옮기고 나뉘었는지 확실치 않다고 한다.





그 다음 탄생한것이 졸본부여..즉 고구려란다.

그리고 북부여를 계승하게 되었단다.



주몽이 원래는 부여사람이었고..

독립해 나와서 졸본땅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졸본부여라고 한다는 것,



하지만 스스로 부여 출신임을 거부했기 때문에,

부여라기 보다는 새로운 고구려로

거듭났다고 봐야할 듯하다.



주몽의 손자 대무신왕 때에 대소를 죽이고

동부여를 멸망시키기까지 했단다.

▲ 역사를 뒤로 하고 도도히 흐르는 백마강을 보는 님들


그 다음으로 탄생한 것은 요동부여 란다.

요동반도 지역에 있었기에 요동부여라는 것,


드라마 주몽에는 우태가 소서노 상단의 행수로 나오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부여왕족이었다고 한다.



소서노도 졸본지역의 세력이 아니라

요동지역의 토착세력인 공손씨의 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소서노는 주몽이 활약하던 시기보다

좀더 후기의 인물이라 한다.



고구려와 부여와의 대립에서 위기를 느낀 부여는..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시키고


강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요동지역의 공손씨와 혼인동맹을 맺었단다.

그것이 우태와 소서노의 결혼이라는...

▲ 동행하던 이에게 는 찍어줄 것을 부탁하고 포즈를 취하는 여인

지나며 사진 찍어도 되나요? 하고 물었더니 괜찮다고...ㅎ



요동지역에 탄생한 요동부여라 한단다.

하지만 결국엔 요동부여는 오래가지 못했다.



삼국지의 공손연의 반란에서 처럼

사마의에 의해 숙청을 당했다는....



소서노는 바로 공손연의 할아버지 공손도의 딸이었다는것이

역사에서 받아들여지는 정설이라 한다.



아무튼 기반이 무너지면서 요동부여를 지속할수 없었기에,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게 됐으며


당시 고구려의 힘으로는 압록강하류지역을 완전히

 장악할수 없었기때문에 한반도 아래로 내려오는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 한다.



그리고, 한반도로 내려와 부여의 역사를 이어나가는데...

그것이 바로 반도부여(백제)라고 한다.



그리고 한동안 국호를 백제라 하다가..백제 성왕때에 이르러,

다시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옛 부여의 기상을 이어받고..



우리 고대국가중 최강자 중의 하나였던

부여의 정통후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국호를 남부여로 바꿨으며.

이게 바로 남부여라 한다.



마지막 열도부여가 남았다.

한반도로 내려온 사람들중의 일부는..좀더 아래로,

일본으로 건너갔단다.



일본 큐수지방쪽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것이 바로 열도부여란다.



백제와 왜와의 관계가 좋았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라는...ㅎ




이런 저런 글을 모아 소개하다 보니

어느새 고란사로 가는 이정표를 만났다.




다음은 고란사와 백마강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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