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여 ] 국립부여박물관
< 2016. 4. 6. >
2016년 4월 금천문화원 향토사탐방 (1편)
부여(夫餘)라는 말의 어원은 넒은 들판을 의미하는
벌(伐, 弗, 火, 夫里)이라는 것이라거나
바이칼 호수를 끼고 살는 사람들의 고향인 "브리얏트라"처럼
우리말의 "부락"의 어원이란 학설이 있는 것 같다.
하여튼 부여 땅이 역사의 전면에 그 이름을 휘황하게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백제 역사와 긴밀히 연계되면서부터 같은데...
475년에 백제가 고구려의 급습을 받아
수도인 한성(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을 상실하고
지금의 공주인 웅진성으로 천도함에 따라
그 서남방에 소재한 사비성(泗비城)이라는 이름의 부여 땅이
역사 기록에 나타나게 되었단다.
그 이후 찬란히 꽃피운 역사를 비롯하여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망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출토되거나 발견된 이지역 유물들을 모아놓은 곳,
부여국립박물관 앞에 섰다.
버스에서 내려 박물관 경내에 진입했을 때
제일 처음 눈에 띠는 것은
노란 함박눈이 내리는 듯한 산수유 속에서
미소짓는 백제 석상이었다.
이 지역 부여에 사는 이들을
이 곳이 아름다운 충절(忠節)이 빛나는 고장이라는
자긍심을 가지며 살고 있단다.
우리 나라의 고대문화는 압록강·대동강·한강·금강·낙동강 등
큰 강의 하류지역을 중심으로 발생돼 왔으며,
그 중에서도 예로부터 금강유역 서남 지방이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져 왔다.
▲ 이종학 문화원장과 33명의 회원들이 관람에 열중하는 모습
이 곳에서는 농사가 잘 되고
해상교통이 발달하여 중국이나 일본과의 교류가 용이했다.
하여 개방적이고 안정된 생활이 가능한 가운데
일찍이 찬란한 민족 문화를 꽃 피운 고장이기 때문이다.
▲ 선사시대 유물인 토기들도 많이 발굴되었다.
청동기시대의 민무늬 토기는 아가리가 밖으로 약간 벌어졌으며,
배부른 몸통에 비해 바닥면이 매우 좁은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송국리식 토기는 생활용기뿐만 아니라 독널무덤으로도 사용되었다.
독널무덤으로 사용된 송국리식 토기는 바닥에 구멍이 뚫린 예가 많으며,
독널 안에는 주로 대롱옥이 부장되었고
독널은 유아를 묻거나, 성인이 죽은후
살이 썩은 다음 뼈만 추려서 매장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초기 토기 보다 더 발전한 형태의 그릇들도 많았는데...
밀폐된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내
이전보다 토기를 오래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것으로 예상한다.(펌)
암튼, 부여는 백제의 고도(古都)이다.
부여에 부소산(扶蘇山)이 없었고 백마강(白馬江)이 흐르지 않았더라면
백제 도읍지로서의 역사도 없었을 것이다.
▲ 돌칼, 화살촉 등 옛 유물들
어떤 원인으로 발생한 화재 현장에서
흙이 딱딱하고 견고하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 선사시대의 인류가
흙으로 만든 그릇류를 불에 구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토기의 역사가 아닐까 싶다.
돌을 이용해 칼과 같은 물건이
깨지지 않는 청동기와 철기문화로 발전하였지만 말이다.
부여 박물관은 전시품들은 그런 문화의 흐름을
알기쉽게 전시해 놓은 것 같았다.
한편, 부소산은 해발 106m로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수려하고,
백마강은 그리 깊지는 않으면서 맑고 깨끗하다.
그래서 강변에 펼쳐진 기름진 터전은 백제 26대 성왕(聖王)이
좁은 웅진(熊津)을 떠나서 큰 뜻을 품고
이 곳 널찍한 땅을 찾으신 임금의
마음에 드는 곳임에 연유되었을 것이다.
옛말에 인걸지령(人傑地靈) 즉, 인물은 그 지역의 정기를 타고 난다는
말과 같이 천혜의 아름다움을 갖춘 곳이다.
저 불세출의 위국충절로 한 몸을 던지시어,
'충신은 죽어도 나라와 임금을 잊지 않는다'고 옥중에서까지
나라의 장래 일을 걱정하며 굶어 죽은 성충 (成忠)과
흥수(興首)는 가족의 목을 스스로 베었는가 하면
황산벌로 진군한 그 늠름한 기상의 용장
계백(階伯)이 길러진 곳이다.
토기문화에서 어느덧 청동기 문화로 황금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으며 역사까지 아우른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면
단순한 백제의 역사는 극히 일부 인 것 같았다.
천고에 유한을 남긴 채 낙화암에서 꽃처럼 몸을 날려
백제 여인의 드높은 정절을 보여 준
그 들의 넋이 서린 곳도 부여인 것이다.
나는 정리된 이 기와의 무늬에 빠져 한참동안 있었다.
기와가 출토된 지역(마을)에 따라
무늬가 조금씩 다르고
흙의 종류에 따라 기와 빛깔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기와의 무늬는 다식에 그려지는 것과 같으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다시 부여이야기, 나당 연합군에 짓밟힌 조국 광복을 위하여
용감히 일어선 왕족 복신(福信), 승려 도침(道琛) 등
수천 수만의 백제 부흥군은 비록 꿈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3년여에 걸친 숭고한 구국의 광복운동을 했다고 한다.
‘부여(夫餘)'란 지명은
단군 왕검의 넷째 아들 이름인 부여에서 유래됐단다.
옛 한반도 서남부 이 지역이
주변 아시아의 나라들과의 교류를 나타낸 그림이다.
해상을 통해 문화 교류가 이루어 졌음을 알수 있고
중국과 열도사이를 잇는 역활을 했다는...
한편, 부여의 유명 관광지인 부소산은
단군 왕검의 둘째 아들 이름인 부소에서 유래되었다는 말도 있다는...
다양한 역사이야기가 검색되었다.
좌측 아래 모서리 사진은 부소산 절터에서 발견됐고
'치미'라고 부르며 기와 지붕의 네 귀퉁이 끝부분에 놓인단다.
이 지역과 관계된 불교 역사 연대표,
불교는 중국쪽에서 들어와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전파됐단다.
불교는 물론이고 건축 기술이 뛰어난 우리 선조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릇 굽는 법이나 절을 짓는 방법 등을 전수시켰음에도
옆나라 놈들은 이를 부정하고 있다고 했다.
왜놈들이 우리민족에게 행한 나쁜 짓은 지워지기 힘들거다.
우리나라 뿐만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에서 벌인 극악무도한 왜놈들의 행위는
다른 민족의 역사에 새겨져 영원히 원수로 여겨지지 않을까 싶다.
몇년전 중국 남경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중국은 왜놈들의 남경대학살 현장을 그대로 박물관으로 만들어
보존하는 사례에서 보아도
왜놈들의 국민성이 후세에 생생히 전해지고 결국 유전자에까지
영향을 미칠것을 생각하면 끝까지 원수로 취급될듯 하다.
불교문화가 민간에 영향을 줘서 작은 돌에까지
불상을 새겨졌나 보다.
그때도 부처님은 연꽃위에 모셔졌음을 알수 있었다.
왜 부처님은 연꽃위에 모시는 것일까
궁금한 나머지 검색을 해봤다.
연꽃이 불교의 상징적인 꽃이 된 것은 다음 몇가지 이유에서란다.
(첫째), 처렴상정이다.
연꽃은 깨끗한 물에서는 살지 않는다.
더럽고 추하게 보이는 물에 살지만,
그 더러움을 조금도 자신의 꽃이나 잎에는 묻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불자가 세속에 처해 있어도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아름다운 신행의 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
(둘째), 화과동시이기 때문이다.
연꽃은 꽃이 핌과 동시에 열매가 그 속에 자리를 잡는다.
이것을 '연밥'이라 하는데,
즉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한 수단이며 열매의 원인인 것이다.
이 꽃과 열매의 관계를 인(因)과 과(果)의 관계라 할 수 있으며
인과의 도리는 곧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셋째), 연꽃의 봉오리는 마치 불교신도가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경건히 서 있는 불자의 모습은
마치 한 송이 연꽃이 막 피어오르는 것과 흡사한 것이다.
이러한 몇가지 이유에서
연꽃은 불교의 상징적인 꽃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다.
연꽃(蓮華)은 연화(蓮花)라고도 하는데
소택(沼澤, 늪지대)에 생(生)하는 숙근초본식물(宿根草本植物)이다.
꽃의 색향(色香)이 사랑스럽고 또 진흙 가운데 나서
청정(淸淨)한 꽃을 피우는 것으로
인도에서는 고래(古來)로 진중(珍重)한 보배로 여기고,
불교(佛敎)에서도 높여서,
불타(Buddha)나 보살의 좌(坐)를 흔히 연꽃의 받침으로 한다. (펌)
백제의 미소라 칭하는 서산마애삼존불 사진이 있었고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과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 사진이 있었다.
서산은 캠핑시 이용하는 용현자연휴양림 근처여서 직접 가봤으나
태안 동문리와 예산 회전리는 근처에 가면 봐야겠다.
각 전시실로 통하는 박물관 건물의 중앙,
그 중앙에 서서 파노라마 사진을 담고 다른 전시실의 사진도 남겼다.
그 다음 들어간 곳은 기증된 문화재들의 전시공간
내가 중학교에 진학했던 시기에는
문화재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였고 문화재급 도자기류
그리고 옛 화폐 들을 엿장수가 헐값에 거둬 들였었다.
그런 유물을 개인이 구입하였거나
집에 보관하고 있던 유물이 기증돼 빛을 발하는 문화재들을 본다.
문화재는 공기외 습기 그리고 빛 등이 통제 되는
적절한 공간에 보존되어야 하지만 일반가정에 두면
훼손이 심하므로 보존이 어려운 면이 있어
자칫 조상의 유물을 훼손시킬수 있으므로
전문기관에서 보존케 하는 것도
후손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지 싶다.
기증된 각각의 문화재 옆에는 어디사는 누가
기증하였는지를 소개하고 있었다.
다는 아니지만 얼추 관람을 하고서
약속된 주차장으로 가는 길... 그 길엔 기념품 판매소가 있었다.
모두가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일 듯.
약속시간이 10분 정도 남았다.
마지막으로 휘리릭 주변의 모습을 담았다.
박물관을 향한 좌측편에 활짝핀 동백...
겹꽃인 것을 보면 개량종일지도 모르겠다.
노란 산수유엔 꿀벌이 많았다.
능소화 수형을 저렇게 가꿀수 있음을 배운다.
성상리 편백을 감고있는 능수화를 저렇게 가꿔야 겠다.
비석 받침, 비석 받침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초기 우리나라에선 거북무늬였는데 9세기 이후에는
용무늬로 변모했다고 한다.
동사리 석탑, 석탑에 대해선
다음편에서 조금더 깊게 소개할 예정이다.
다만 중국이나 일본에는 석탑이 없다는 것,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넘어가자.
원래 부여군 동사리에 있었던 탑을 옮긴 것이란다.
내용 중 셋째 줄에 "안상"이란 설명이 나오지만,
나는 당최 처음듣는 단어여서 탑 아랫부분을 찾아보았는데
가운데 세개의 무늬가 '안상'이었다는...
그렇게, 부여박물관을 나서 주차장으로 향했고
그 길에 피어나는 할미꽃을 보았으며
뒤돌아설 때 백제의 미소로 우릴 배웅해 주었다.
이후는 다음편(정림사지)에서
^L^
'여행과 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부여 ] 궁남지와 구드래조각공원 (0) | 2016.04.16 |
---|---|
[ 부여 ] 정림사지와 오층석탑 (0) | 2016.04.15 |
[ 부여 ] 금천문화원 향토사 탐방 가는 길 (0) | 2016.04.08 |
[ 가족 ] 2월의 소소한 일기 2 (0) | 2016.03.01 |
[ 경주 ] 찬란한 우리의 문화유산 불국사 (0) | 2016.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