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금천문화원 향토사탐방 (2편)
- 부여 정림사지 -
< 2016. 4. 6. >
부여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버스에 올라 정림사지로향했다.
정림사지로 가는 길가에 벚꽃이 만발하였다.
예전에 귀하던 벚꽃이 요즘은 매우 흔해서
우리나라 꽃이 무궁화가 아니라 벚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내 버스는 정림사지 주차장에 도착하였고
미리섭외된 박경남 해설사께서 친히 우리를 맞아주셨다.
해설사와 인사를 나눈 회원님들은
그를 따라 정림사지 입구에 섰고
임나영 간사님은 매표소를 찾아 관람권을 구입해 왔다.
경로우대 회원들의 명단을 미리 제출해 시간을 아끼고
금액을 할인받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그만큼 오랜 진행으로 노하우가 축적돼 있는 듯...
이렇게 쌓아진 연륜과 신뢰는
조기마감 되는 현상이 빈발하는 것 같다.
정림사지 박물관 ,
정림사지는 부여사적 제301호,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중건 당시 절 이름이 정림사였고,
1028년(현종 19)에 중건 되었음이 밝혀졌다.
1979~84년에 걸친 대대적인 발굴조사에 의해서
절터가 중문·석탑·금당·강당이 남북선상에 일렬로 배치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두른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인
남북일탑식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회랑지 서남 모서리에서 다량의 기와편,
납석제삼존불상, 소조불, 북위시대의 도용과 관련을 보이는
도용의 파편 등이 발견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과
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펌)
30여명의 인원이 입구에 들어서자 비좁고
나는 몇해전 왔던 곳이고 그때에 배운 내용이어서
일행과 떨어져 사진을 찍으며 뒤따른다.
앞서 설명한 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의 모형인듯...
라당연합국에 패망 하는 등 전쟁으로
목제로 만들어진 건축물들은 흔적만 남아있지 싶다.
부여박물관에서 보았던 토기류들...
불에 타지 않기 때문에 진품들일 듯...
정림사지를 관람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석탑은 우리나라에 주로 존재를 한다고 했다.
불교가 처음 인도에서 출발하여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교구려,백제, 신라)에 들어 왔고
다시 일본까지 전파되는 역사 속에서
나라별로 목탑을 만들었지만..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나라별 자연환경 등에 따라 재료가 대체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석탑이 활발이 만들어 졌단다.
예컨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지형적인 이유로
석탑을 만들기 어려웠다는 것,
중국의 경우는 목탑이거나 흙을 구어 만들었단다.
중국은 산악지역이 있긴하나 들판지역이 많기 때문에
주변의 흙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중국여행 중에 본 만리장성도
흙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고 의아해 했던 기억이다.
일본은 화산지역이래서
흙조차 힘이 없어 오로지 나무로만 탑을 만들수 있었단다.
하여 한국은 석탑의 나라, 중국은 전탑의 나라,
그리고 일본은 목탑의 나라라고 설명하였다.
이전 부여박물관 관람기에서 설명했듯이
옛 한반도 서남부 이 지역이
주변 아시아의 나라들과의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고 들었다.
이러한 문화 교류를 통해 부여는
중국과 열도사이를 잇는 역활을 했다는 설명을...
회원님들이 듣고 계시다.
절에서 탑은 왜 필요할까?
해설사는 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만들며
그내부에 보존함을 둔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부도라는 것을 두어
스님들의 사리(유골)를 보존한다고 설명 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어느 글에서 읽은 탑과 진신사리에 대한 것은 오해라는
내용을 읽은 적 있어 소개 한다.
볼교신자가 아니지만 잠시 옮겨보면 불탑은 무덤이며,
인도어로 높이 솟은 무덤이고,
물론 보통 인간의 유골을 안치하는 무덤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탑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안치한다고 설명하는데 대한 반론일 수 있다.
암튼, 시대가 흐르면서 탑이 계속 만들어지는데
부처님의 진신사리의 수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믿기 힘든 구석이 있다고 보여져
탑과 진신사리에 대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의문에 대하여 박경남 해설사는
진신사리의 숫자가 모든 탑에 봉안할 수 있을 정도로 많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도 곧 부처님과 다름 없다하여
불경, 즉 경전(법사리)을 써서 넣기도 한다고
시원하게 보충설명을 해 주셨다.
그리고 법당 앞에 탑을 조성하는 이유는
불자로 하여금 항상 죽음을 생각(탑구)하라는 의미라 했다.
쉽게 말해 시체를 항상 보면서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것이 곧 깨달음이란다.
그리하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는 의미인 것이라 한다.
그리보면 탑은 곧 무덤인 셈이다.
법주사엔 여러번 가보았고 팔상전이 목탑 같은데..
그곳에 사리가 안치돼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고 했더니
박경남 해설사는 팔상전은 무덤(탑)인 동시에 금당(불전)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리도 안치돼 있다고 친절히 설명해 주셨다.
백제의 탑과 신라의 탑을 구별하는 방법을
해설사 선생은 설명해 주셨다.
백제는 주로 5층이고 신라는 주로 3층으로 탑을 만들었단다.
당시 국경이 시대적으로 변화가 있으나
석탑의 층수를 보면 신라의 영역이었는지
아니면 백제의 문화지역인지... 또는 시대를 가늠 할수 있단다.
부여시대에 말이나 저울 등
부피와 무게 및 길이를 재는 도량기구가 만들어 썼단다.
치미(鴟尾), 격식이 있는 건물의 지붕마루 중
용마루 양쪽 끝단에 얹어 놓는 장식기와를 지칭한단다.
비슷한 용어로는 취두(鷲頭), 취와(鷲瓦), 치문, 치미, 망새 등이 있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새 날개나 물고기 꼬리모양의 장식기와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치미라고 한다.
조선시대 이후로는 점차 치미 대신에
용마루 양쪽을 물고 있는 용머리 모양의 장식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을 취두라고 한다.(펌)
처음 봤을 땐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 여겼으나
다르게 보면 구운 흙(옹기?)처럼 보이가도 하였는데...
덩치가 크면서 무늬가 정교했다.
백제시대의 불교와 불상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불상(佛像)이란 불교신앙의 대상인 부처와 보살의 형상이란다.
그렇게 전시관 관람후 다른 전시장으로 가기위한 회랑에선
잠시 백제시대의 정원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당시 정원 축조법을 부여인들이 일본에 전수했으며
일본 정원이 현재에 이른단다.
시간관계상 모든 전시실을
옮겨 다니지는 못하겠으나
정림사지에서 가장 중요한 오층석탑은
알아야 한다는 해설사님...
정림사지 5층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갬색한 바를 참고하면,...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시대 최대의 절이었던 익산 미륵사 절터 서쪽에 있단다.
이 탑은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이다.
현재 6층의 탑신이 남아 있으며
원래는 7층 또는 9층이었다고 전해진다.
낮고 작은 기단 위에 건립되었으며
각 층의 탑신은 각 면이 3칸으로 되어 있다. (펌)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탑의 문제점인,
수명(세월에 썩거나 화재에 취약하여...)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이용해 탑을 만들었단다.
그러나 석탑은 가공상의 문제 등으로
목탑처럼 크게 만들기 어려워서
대신 형식을 간단화하는 등
규모를 작게 하여 축조하였단다.
그 덕분에 오랜 세월과 환란 속에서도
우리앞에 서 있을 수 있어 사랑받는 것이 이 오층석탑이라 했다.
오층석탑은 수치적으로도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어 졌다는 설명도 있었다.
암튼 백제시대의 석탑은 오층이 주류이고
우산처럼 기단을 좁게 만들고
지붕을 크게 하여 약간 불안한 느낌을 주지만...
빛물이 기단에 흐르지 않고 아름답단다,
이와 비교하여 신라시대 석탑은 3충이 주류이고
기단을 넓게 만들어 윗쪽 빗물이 흘러내리는 면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 백제에서 초기 석탑을 만들었고
신라탑(석가탑)은 완성단계에 해당하며,
보다 안정된 자세로 서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부여인들은 흙으로 불상을 만들기도 했다는....
여러가지 고대 유물을 보았다.
지나 치려다 멈춘 곳은 부여지도 앞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보다 11년 뒤에 만들어진 것이라 설명하면서,
고지도는 정림사지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으며
백제시대 사비가 불교문화의 중심이었음을 소개한다고 했다.
비문에는 당시 부여의 마을과 인구가 소개돼 있으며
당시 620만 명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단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했다는 자랑을
탑신 우측 우주부분에 자랑하는 비문을 적어놓아
후손인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주변에서 우리를 탐하는 나라에 대한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된다는 경감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엔 이를 도외시하는 정치인도 있고
그런 부류에 장단을 맞추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아
선량한 국민들을 안타깝게 한다.
방문객들이 바라는 마을을 적을 글들도 본다.
취직의 적실함 등 다양한 꿈과 희망의 글도 있고
간혹 비난을 일삼는 막말 댓글성격의 글도 보였으나
간절하게 비는 순수한 문귀가 더 많았다.
백베는 바다건너 일본열도에 문화를 전파하였단다.
그런저런 설명을 듣고
회원님들은 정림사지 현장으로 향했다.
절터에 입장하기 앞서 해설사 선생의 설명을 듣고
기념촬영을 시도한 것 같은데...
개인행동하는 이들이 많아 일부만 촬영됐다는...
암튼 그렇게 정림사지 오층석탑 앞에 왔다.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538~660년)의 중심 사찰터란다.
여러개의 돌을 다듬어 맞춘 오층석탑
이러한 탑은 남쪽에 위치하는 것이 전통이란다.
그 탑 남쪽엔 사각형 인공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에는 수련이 자라고 있는 것 같았으며
수초 부근에는 물고기도 놀고 있었다.
그렇게 오층석탑을 이곳저곳에서
조망해 보면서
연신 찾아드는 탐방객들을 보면서
버스에 올라 다음여정을 이엇고
점심식사를 하기전 잠시 궁남지를 들러 보기로 했다.
파릇한 실버들은 다음편 궁남지에서...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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