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키여행 ] 카파도키아 데린쿠유[ 6일째, 4-3편 ]
< 2015. 3. 20. 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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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15.부터 3. 23.까지
터키를 여행하였습니다.
오늘은 여정 중의 6일 째이며
네 부분 중 3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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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는 카파도키아 오프로드를 했고
2편은 버스를 타고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이곳 저곳을 살폈으며
이제 3편을 시작하기 위해 지하도시 데린쿠유를 향했고
잠시후 도자기 공방을 들러갑니다.
그곳은 베네사세라믹이라는 공방이었으며
오랫동안 가족이 전통적 기업으로 이어온 회사라고 합니다.
카파도키아 넓은 지역 중에는
도자기를 만들수 있는 양질의 흙이 나오는 곳이 있나봅니다.
안내받은 곳에 도착하자 이내 발견한 것은
으흘라라 다녀 오던 날
동굴호텔에 도착한 직후 보면서 신기해 했던
그 도자기와 같은 종류였습니다.
일행 중 한 사람에게 도자기 만드는 체험기회를
주겠다고 우리에게 얘기 했을 때...
선뜻 나선 분은
천안에서 오신 깨소금 주부이십니다.
어찌나 적극적이고 쾌활하신지...
남편은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습니다. ^^
그 옆엔 서툰 한국어로 설명하는 사회자 여인이 있었고
이집트 벽화인가 아니면 박물관에서
여인이 어깨에 저런 물병을 끼고 물(술?)따른던 모습을
어디서 본 듯 하지 않나요.
하늘색 옷을 입은 사람은
도자기 장인(명인) 같은 분이랍니다.
장인은 경력이 15년이상으로
가업을 잇는 이들에게 붙혀지는 칭호라고 합니다.
사실 도자기 만드는 모습이나
체험행사를 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흔한 일 이지만...
터키에선 어떻게 만드는지
우리나라와 어떻게 다른지 처음보는양 지켜보기로 했네요.
그러고 보니 내숭쟁이들 같더라는...ㅎ
지금 만드는 것은 뚜껑이 달린 설탕단지라 합니다.
먼저 아랫부분을 만들어 보이고
나중에 뚜껑을 따로 작업하는데도
딱 들어 맞게 만드는 것이 별로 신기했습니다.
응달에서 보름정도 건조시킨 뒤
1080도 온도로 초벌구이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도자기 모양이 다른 것 같으면서도
초벌구이나 유약을 바르는 것들...
일일이 문양을 그리고 굽는 일들이
우리와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 보다 규모가 작은 것 같기도 하지만...
우리도 저 처럼 수공으로 하는 곳이 제법 있잖아요.
요즘은 소형 전기로가 등장해서
저런 일을 혼자 하는 이도 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암튼 일일이 자기만의 독특한 문양을 섬세하게
그리는 여인들이 보였습니다.
예전에 국전 당선작에 그려진 수많은 무늬를 보고
끈기와 반복된 작업이 예술이라는 생각을 한 적 있습니다만
저 도자기에 그려넣는 무늬가
그와같은 생각을 마찬가지로 떠오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암튼 저기에서 작업된 자기들이
저 곳 매장에서 판매되는 것 같았습니다.
아래 무늬의 평평한 자기는 벽에 거는 액자 같은 것인데...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줄기에 매달린 수많은 꽃이 그려진
저 문양이 인기가 많은데 이는 남녀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가족이 늘어나고 번성해 행복하게 살아가는 염원 같은 것이 담겨있어서 가정마다 하나씩 둔다는 겁니다. 옆지기에게 저거 아이들에게 사다 줘야 겠다고 얘기했더니.. 슬쩍 뒤돌아서 전화를 해 봤나 봅니다. 아이들이 그런 것을 싫어한다며 사지말랜다고 하면서 만류하는 바람에 돈이 다소 굳긴 했으나 그 돈은 두었다가 가족여행을 하자내요. 사실 저런 접시 하나가 보통 몇십만 원을 호가하고.. 비싼 것은 몇백만 원을 훌쩍 넘는 다고 하였으며, 어떤 것은 가격은 고사하고 그냥가져가라 해도 덩치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지요. 암튼 오랜동안 끈기를 가지고 그려야 하는 그런 작업이어서 비쌀 수밖에 없을 것도 같습니다만...ㅜㅜ 잠시후 특별 전시장으로 안내 되었습니다. 이곳은 촬영금지랍니다. 그렇다고 시간을쪼개서 방문한 우리 일행에게 대한 예의가 아니고.. 제겐 특히나 불만이죠. 하여 몰카 몇장을 남깁니다. ㅎ 이슬람 문화권의 사람들은 저런 주전자 하나쯤을 집에 두는 것이 문화인지도 모르겠고... 이슬람의 색상같은 푸른색 시계나 도자기 역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구입한 사람은 보이진 않고 아이쇼핑만 잔득 하고 나오는 것 같습니다. 부피가 있기 때문에도 구입이 망서려지고 자칫 파손될 우려가 있어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구경을 잘했습니다. 이천도자기 축제 때 한번 가 보고서는 다시는 가지 않지만...이곳은 한가해서 볼만했어요. 그 때의 시각이 오후 1시 였나봅니다. 버스에 올라 유명한 동굴식당으로 이동하는 길입니다. 새벽에 일어나서부터 여기까지 참 바삐 다녔습니다. 이젠 점심식사를 할 차례라는데.... 카파도키아 중에 도자기로 유명한 아바노스(AVANOS) 지역에 있는 암굴(동굴) 식당으로 이동해 항아리케밥을 먹는다고 해서 일행들은 더 기대를 하게한 알티노자( Altinocak)동굴 식당입구 입니다. 식사후 깊은샘이란 뜻을 가진 데린쿠유를 방문한 다음 앙카라로 먼 여정을 잇는다고 했습니다. 식당은 자연동굴을 이용한 것 같지는 않고 적당한 산을 골라 옆으로 파고 들어가 만든 것 같았습니다. 어는 곳은 테이블과 의자까지 돌(흙)로 만들어 진 것 같았지요. 일본인들 떠드는 소리가 들렀고 별실 같은 것도 마련되어 있는 실내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다른 환풍장치가 있었는지 냄새도 나지 않고 온화 했으며 일행들 표정도 좋아서 몇장의 사진을 담았습니다. 항아리 케밥도 TV에서 보듯 뚜껑 여는 것을 보여 주었으나 제빠른 동작이기에 사진에 못담았네요. 음식이 제법 괜찮았기에 오랜만에 배를 불린후 밖으로 나갔습니다. 매화가 정말 멋지게 피었네요. 파란하늘과 흰 구름과 어울어져 보기 참 좋았습니다. 저 아래로 보이는 도시(마을)는 아바노스(AVANOS) 같습니다. 야간에는 밸리댄스 공연이 벌어진다는 그 곳 말입니다. 물론 정확하진 않고요. 멀리서 보라보는 풍경이 그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미루나무 또는 미류나무라고 부르는데 미류(美柳)나무는 미국에서 들어온 버들이라해서 붙혀진 이름이라지요. 암튼 그 미루나무를 터키에선 어찌부르는지 가이드 강선생에게 물어봤지요. 강선생은 모르면 동승한 현지가이드나 운전기사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현지에선 저 나무를 '카왁'이라 부른답니다. 암튼 줄지어 서 있는 저 나무들 사이에 잠시쯤 가만히 앉아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앉아있는 내 귓전으로 바람에 팔랑거리는 이파리들의 노래가 들려올 것 만 같아요. 나는 저 나무들의 풍경은 터키에 주어진 천혜의 풍경이라고 것을 지울수 없었지요. 내가 터키를 다시 찾는 다면 저런 미루나무가 있는 풍경과 열기구를 타고 싶어서 일겁니다. 식사후 자유시간이 잠시 주어진다고 합니다. 그 뒤 출발을 한다고 했지요. 화장실도 다녀와 손도 씻고 출발준비를 하면서 시내를 전망합니다. 저 앞산 봉우리도 비들기 집처럼 바위에 굴이 신비스럽게 뚫려 있습니다. 터키란 나라가 로마제국의 중심지였기에 나라 안에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함께 존재하였나 봅니다. 예전 우리나라 조선시대 때 천주교인(기독교인)박해가 정당했던 것 처럼 자행되듯 기독교 박해가 이루어 졌는데... 박해 받는 자들이 이 카파도키아 깊은 산 속으로 피신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 굴을 파고 살기 시작했나 봅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무슬림들로부터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할 장소로 사용됐다합니다. 저기 저 마을엔 가해자와 박해자의 후손들이 지금 살고 있지 않을까요. 잠시후에 간다는 데린쿠유는 식당에서 50분 정도를 더 가야 한답니다. 저기 보이는 꽃들이 살구 나무일까요. 생각해 보니 아름다운 계절에 여행을 온 것 같습니다. 버스에 오른 시각은 오후 1시 30분 출발을 한 다음 잠시후에 설산이 보이고 다른 마을도 나타났습니다.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은 곳도 있었으며 길가 마을의 양지쪽 창가에 할머니와 손녀의 환한 웃음이 보였지요. 터키는 땅덩이도 넓지만... 날씨도 첨 변덕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그만 한 곳을 한시간 남짓 달렸나봅니다. 그리고 정차한 곳은 데린쿠유 주차장... 잠시 걸어 입구로 가는데 길가엔 기념품들이 잔득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절 입구 등 관광지 부근에 식당과 기념품 가게가 몰려있는 것과 비슷하지만 우리나라 보다 아주 소규모였어요. 데린쿠유 입구에 도착했나봅니다. 데린쿠유에 입장하기 앞서 가이드의 설명을 보퉁하기 위해 검색을 해 봤습니다. 녹색글씨는 검색내용이고 청색 글씨는 제가 덧붙힌 내용이 되겠습니다. 우선 내부 개념도를 먼저 봐 두시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데린쿠유 지하도시(Derinkuyu Underground City)는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300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카파도키아의 괴뢰메(야외 박물관) , 젤베 계곡(Zelve) , 비둘기 계곡 우치사르(Uchisar) 등이 있어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온갖 버섯 모양의기암괴석들이 드넓은 계곡지대에 펼쳐 있다. 세계 어디에서도 볼수 없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데... 이는 수백만년전 예르지예스산(3917 m) 등에서 분출된 용암으로 인해 형성된 이 곳의 지형은 버섯모양의 기암괴석으로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카파도키아를 더욱 경이롭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최대 3만명까지도 수용이 가능한 대규모 지하 도시이다. 이 곳의 형성시기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히타이트 시대즈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본격적인 확장기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 곳에 들어와 교육기관과 교회, 와인 저장고 등을 축조하기 작은 규모의 마을부터 거대한 도시에 이르기까지 총 40여개에 달하는 거주지가 발굴되었으나
오늘날 일반인에게는 소수만이 공개되고 있으며, 이 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 Nevsehir에서 29Km떨어진 곳에 위치한 데린쿠유 지하도시이다. "깊은 우물"이라는 뜻인 데린쿠유는 1965년에 처음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나 미로처럼 얽혀있는 좁다라한 놀랍게도 내부의 환기시설은 아직도 잘 작동하고 있다. 데린구유 지하 도시는 총 깊이가 55m에 달하는 8층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현대주택의 층수로 24층의 높이이다) 1층과 2층에는 마구간과 포도주 압착기, 혹은 교실이 위치하고 있고 십자가 모양의 교회, 지하감옥 및 묘지는 지하층에 위치해 있다. 지상에서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느낀 것은 한마디로 대단하다였습니다. 그런데 왜? 란 단어가 머리에서 맴돌았지요. 예전엔 전쟁의 의미가 개인대 개인 그리고 가족간, 마을간, 지역간, 나라간의 경쟁은 삶의 목표였고 이겨야 살아 남는 것 아니였나요.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적으로부터 재산빼앗고 사람조차 종으로 부릴 수 있었던 것이었으며 심지어 어떤 때는 육신이 승자의 먹이가 되기도 하였으니 지하로 피할만도 했던 것 같습니다. 피해서 살고 있는 곳이 적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방법이 동원됐으며 발견되더라도 칩입을 억제하기 위하여 각가지 방비 대책을 만들었더군요. 아래사진은 외부에서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300~400Kg의 바위 문(스톤도어)인데,,, 젋은 안쪽에서는 문을 쉽게 닫을 수 있는 반면에 공간이 좁은 밖에서는 곤란하다고 합니다. 통로를 좁게 만들었기 때문에 훈련받은 칩입자라 하더라도 무기를 들고 다니기가 매우 힘들어서 맥을 추지 못한다는 겁니다. 굴은 용도에 따라서 다양하게 지어졌는데.. 우물도 있었고 환기구도 있었으며 장소에 따라 함정(부비트랩)까지 있었고 우회 루트까지 구성돼 있다고 하며 가이드가 아래 사진의 수직구에 작은 돌을 넣었는데... 아래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매우 깊다고 하였습니다. 모르면 함정이 될 수 있는 그런 곳이기에 철망으로 덮여져 있었네요. 처음 들어가는 사람을 미로에 갖혀 죽기 십상이라 합니다. 지하 24층 깊이로 만들어 졌다니 대단하지요. 지금은 저 처럼 전기불이 켜 있지만... 예전에는 없어서 캄캄했을 테고 함정에 쉽게 떨어 졌겠지요. 하여 이 지하도시가 오랬동안 박해받는 자들이 숨어 살 수 있었나 봅니다. 중간 중간 저런 스톤 도어가 설치돼 있어서 잘못 들어 왔다간 목숨을 부지 할수 없었을 겁니다. 이 사진은 밖쪽(막히는 부분)이고 이 곳은 안쪽으로 잠그는 사람이 있는 곳인가 봅니다. 오른쪽 방향으로 밀어 굴리면 되는거죠. 스톤도어를 통과 했을지라도 높이와 폭이 좁아서 무기를 버려야 하고 만일 버리지 않더라도 쓸 수가 없기에.. 방어군에게 쉽게 진압될 수밖에 없었답니다. 뭐 요즘의 무기 같으면 쉽게 공략이 가능했지만...예전에는 아주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 곳을 다니면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지하도시에는 학교와 감옥, 처형장, 교회까지 있는 등 필요한 것이 다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곳이 로마의 카타쿰베와 다른 것은 카다쿰베는 죽은 자들의 지하 무덤인 번면 이곳은 산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는 것입니다. 설계에 의해 한꺼번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수백년에 걸쳐 조금씩 만들어 졌으며 연구결과에 따르면 조명시설도 없이 많은 이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박해 시대에 그렇게 열악한 조건 속에 살았기 때문에 수명이 45세 정도에 불과 했답니다. 이 데린쿠유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돼 있으며 이 지하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식량을 얻기 위해 농부로 위장해 밖에서 농사를 지어 이곳 지하로 전달하는 방법을 썼을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지하에 거주하는 2만여명의 배설물은 밖으로 이동시켜 농사용 거름으로 사용했을 것이랍니다. 그런데 굴속을 다니면서 조금 이상한 것을 느꼈습니다. 한국에서 굴을 들어가면 온도가 12~14도 정도인 것이 보통이므로 선듯할 정도의 한기를 느끼는데 이고은 이상하리 만큼 기온이 높다라는 것이었네요. 문외안이 보는 견지에선 환기가 잘되고 건조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네요. 저 처럼 고개를 숙이고 간신히 들어올 정도로 비좁은 곳이 많았기에... 외부에서 적이 무기를 가지고 들어오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 이라는데 의문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미국이 월남에서 베트콩에게 패한 이유가 땅굴아니었나요. 호시탐탐 노리는 북한의 땅굴 책동도 눈여겨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박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다시한번 생각하며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공중전화박스의 색상도 청색계열이라는... 버스에 오른 시각은 오후 3시, 앙카라를 향해 부지런히 가야한답니다. 그렇게 출발하였고 자리는 중간 우측 안쪽에 앉았습니다. 평원의 지평선 부근에 흰눈이 보입니다. 아마 고산지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잡복이 우거질 것도 같지만... 어쩌다 있는 나무가 미루나무네요. 미루나무는 논둑이나 강둑 등 물가에서 잘 자라는 것으로 어릴 때부터 봐왔는데.... 상식이 틀렸는지도 모르겠고, 미루나무는 지하수 층까지 뿌리를 깊게 뻗어 건조한 지역에서도 잘 자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나무는 없어지고 밀밭만 계속되는 평원 같습니다. 이따끔 한그루의 나무가 고독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안됐다는 마음입니다. 얼마나 심심하겠어요. 마을일까요? 접시 안테나가 있는 것을 보면 민가 인가 봅니다. 이 역시 평원의 중간에 있었는데... 첨탑이 없는 모스크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4편에서 잇겠습니다. ^*^
오랜 세월을 걸쳐 풍화, 침식 작용을 일으켜 부드럽고 쉽게 깍이는 습성을
지닌 용회암지대로 바뀌게 되었다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실제로 관람할 수 있는 구역은 총 면적의 10%에 지나지 않는다.
통로 곳곳은 무너져내린 곳도 많지만
돌로 만든 두개의 긴 탁자가 놓여져 있는 식당
3, 4층에는 거주지와 교회, 병기고, 터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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