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구영신 ] 서산 해미성지와 당진 솔뫼성지
< 2017. 12. 31.~ 2018. 1. 1. >
- 2017. 12. 31. 일요일 -
세 자매 가족은 송년미사와
더불어 순례도 겸하여 서산의 해미성지를 찾았다.
해미성지는 20여년전 시흥동성당 교우들과
성지순례 때 다녀간 곳으로 이번 방문이 두 번째이다.
첫 방문 때는 성지조성 초기여서 빈약했던 것 같은데...
이번엔 제법 성지다운 면모를 잘 갖춘 모습이다.
해미성지는 1866년(조선 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부터
1882년(고종 19)까지 사이에 진행된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 각 고을에서 붙잡혀 온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이 생매장을 당한 곳이라 한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해미읍성 감옥을 거쳐 서문 밖 돌다리에서
자리개질 등으로 처형을 당하였는데,
숫자가 너무 많자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생매장하는 방식으로 처형을 하였다고 전하며,
당시 죽음을 앞둔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를 하였기에,
마을 주민들은 이 소리를 '여수머리'로 잘못 알아듣고
이곳을 '여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신자들을 묶어 물 속에 빠뜨려 익사시켰던 진둠벙과
생매장이 성행했던 해미천 옆에서 죽어야 했던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은 높이 16m의 '해미순교탑'을 세웠고
발굴된 뼈들을 추려
무명순교자의 묘에 안치하였으며,
유해발굴지에는 노천성당을 조성하고,
서문 밖 순교지에 있던 자리개돌 원석을 보존하였다고 한다.
한편, 해미순교성지 부근에는 인근 내포 지방에서 해미로 넘어가며
순교자들의 압송로였던 한티고개가 있는데....
고갯길에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였으며
정상의 1처를 시작으로 해미 방면으로 14처까지 설치되어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각종 유물등이 전시돼 있으며
당시 순교모습들을 재현해 놓아 후세들이 선조들의 핍박받던 역사를
후세에게 일깨워 주는 듯했다.
그중하나가 썰물 때 뻘에 큰 말목을 세워두고
거기에 천주교인들을 옭아 매둔채 밀물이 들어오길 기다리면
자연적으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면서 결국 익사시키는
악랄한 방법까지 동원되었다고 한다.
현대에 살면서 인간의 악랄함을 직접 당하지 않더라도
이웃나라의 역사적 악행을 나무라거나 들쳐 내는 것을 걍험하곤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백의민족이며 순박하다고 하지만
저런 역사를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 모두가 당시 정치인들의 밥그릇 싸움이지 싶다.
물론 지금 정치인들도 다를 바가 없지 아니할까?
도대체 국민들은 안중에 없고 당리당략과 사리사욕에 눈 먼
사람들만 모인 악랄한 집단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의 치소를 둔 곳이라 하며,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며
지역 통치를 하던 곳이란다.
내포일원의 해안 국토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 기록을 남긴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 시기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당시의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단다.
병인 대박해 때 해미 진영에서 조정에 보고된
천주교 신자 처결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돼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 명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이름이 기록된 순교자가 죽향골이 있는
면천에 거주했던 사람이 가장 많은 것 같다.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그렇지 못하였다.
1801년(신유박해) 약1만여 명에 달할 만큼 많았던
조선의 천주교 신도들이 박해를 받은 사건이 알려진 역사다.
위험을 무릅쓰고 천주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해 온
중국의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처형되었으며,
천주교 포교 혐의로 체포된 이승훈, 정약종 등이 사형을 당하는 등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검거되거나 처형당하였는데...
그 당시(조선 시대)에 천주교를
이렇게까지 박해를 하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풍습인 유교 예법과 천주교의 교리와의 충돌이었으며
부모나 임금보다 하느님을 최고로 숭상하는가 하면
조상에 대한 제사도 지내지 않았던 이유가 있고,
당시 집권 세력인 노론학파 입장에서는
반대 세력인 남인들을 견제하기 위함이 큰 이유였다는 것,
남인들이 천주교에 많이 관련되어 있어서
이들을 벌하면 노론의 세력을 더 강하게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 이유였다고 설명한다.
그러고 보면 근래 광주민주화항쟁이니 뭐니 말들이 많지만,
박해역사를 생각하면 민족으로서 더 수치스럽다.
이런 역사적 사건 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과연 신이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문득문득 든다.
하여튼 해비성지 순례와 송년미사를 마친후
덕산에 들러 운천욕을 한 다음 죽향골로 돌아왔다.
- 2018. 1. 1. 월요일 -
세 자매 가족은 새해를 맞아
솔뫼성지로 이동해 첫 미사 봉헌에 참여하였다.
신부님은 통상적인 미사 이외에
유재철 연화회 대표에 대한 신문기사를 인용한 강론도 하셨다.
죽음이 오히려 축복일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데....
죽음을 공부해야 삶이 깊어 진다고 했단다.
누구나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인 듯 죽음을 의식하먀 살면
그 하루하루가 더 소중하게 된다는
그의 말을 소개했다.
신년미사를 마친뒤 죽향골로 출발한 직후
후사경에 햇빛이 눈부시게 비춰 일출임을 깨닫고 차를 세웠다.
모두가 하차하여 고요 속에 비춰지는
새해의 첫 햇빛을 맞이하였다
이글을 보시는 그대,
올 한 해 저 눈부신 햇빛처럼 찬란하기 바랍니다.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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