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징한 담배와의 여정
내가 담배를 처음 피운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교를 파하면 동네 형들을 따라
함께 10여리를 걸어 다녀야 했던 산골에서다.
그 당시는 꽃 문둥이가 어린아이들을 잡아 먹는다 하여
민심이 흉흉했던 시절으로...
선생님들은 학교가 파하면 마을 아이들끼리 모여
단체로 귀가하도록 종용했었다.
당시 우리 마을 형들(1~2년 선배) 중에 누군가
담배와 성냥을 가지고 다녔나 보다.
(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형들은 비행 청소년들이었다..ㅎㅎ)
암튼 그 형들 주도하에
논둑 등지에서 불놀이를 재미있게 했던것 같고...
흥미로운 얘기들을 잘해 주곤 해서
그 형들과 자주 어울렸고 말도 잘 들었던 것 같다.
그 형들이 담배(없을땐 마른쑥이나 솔잎 따위)를 종이에 말아
하급생인 우리에게 피우는 것을 가르켜 주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 고향은 담배 주산지여서 건조실이 많았으며
그곳에 들어가면 잎담배가 수두룩 했다.
당시 어른들은 그런 담배를 썰어 헝겁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긴 담뱃대(장죽)나 파이프에 눌러 넣거나
사각으로 자른 신문지에 놓고 감아 싼 뒤
화롯불이나 성냥으로 불을 붙이면서
뿌옇고 역한 연기를 뿜어대곤 했던 기억이다.~
여하튼, 어른이 돼서 담배 답게 배운 것은 병역의무를 수행 중이었으며
제대 말년(1978년 초)인 어느 전투비행단에서다.
당시 제대 한두달을 남겨 둔 즈음
관례적으로 '열외'라는 특혜가 주어 졌었다.
그땐 근무처에 가지 못하고 내무반에서 빈둥거리는데
동기녀석 다섯이 노닥거리는 것이 일과였다.
담배는 다섯 중에 나만 피지 않았으나
그 녀석들은 나를 그냥 놔 둘 수 없었나 보다.
담배 예찬을 하면서 훗날을 위해
지금이라도 배워야 한다고 부추기는 거였다.
사병에게 보급되는 담배는 이틀에 한갑 분량으로
한달에 한 두번 보루단위로 지급되는데
내몫의 담배를 받으면, 모자라는 상급자나 후임자에게
인심을 쓰거나 관물함에 모으기도 했었다.
암튼, 그 당시 무상 지급되던 담배는
갑자기 고급필터에서 => 저급필터로 품질이 떨어졌던 기억인데
그런 담배를 피워 보라는 동기녀석들의 부추김에
나역시 심심하였고 까짓 거 못할것 없다하여 시도를 하였다.
한 개피에 불 붙혀 빨면 알다시피 너무 역하지만
너덧 개피를 이어 장죽처럼 길게하면 쓴맛이 거의 없어진다.
(필터효과가 극대화돼 연기가 걸러지므로)
물론 사용됐던 담배는 훨씬 독한 담배가 돼서
재사용하지 못하고 버려야 한다.
암튼 이렇게 담배의 역겨움을 약화시켜 녀석들과 필수 있었고
나는 자연스레 담배라는 악마에 포위 되었다.
특히 전역후 주말이면 찾는 고향의 아씨를
만나러 갈 때도 담배를 사용했다.(지금의 내 옆지기)
토요일 일과후 서울서 특급열차로 출발을 하면
고향가는 막버스를 탈수 있었으며 고향집에는 밤에 겨우 도착한다.
특히나 부모님과 저녁식사를 마치고
그리운 아씨네 마을을 갈 즈음은 까만 별밤인 것은 당연,
별들은 눈이 시리게 빛나건만...
어둡고 깊은 산길을 걷고 걸어서
두개의 무서운 고개(재)를 넘어야 갈 수 있는 오지마을
(그래서 내 닉이 "재넘어" 임)
간이 콩알처럼 작은 나는 그 고개를 넘으면서
이상한 동물소리 등으로 머리카락이 쭈삣거리고 소름이 돋곤했는데
칠흑같은 어둠속의 서낭당을 지나
내리막 모퉁이를 돌아갈 쯤엔 그 강도가 훨씬 더했다.
그런 밤중의 산길은 무섭지 않다가도
갑자기 차갑고 소름이 끼치는 유난스런 장소가 있는데
낮에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으면서도
밤에는 꼭 오싹하게 만들지만 어쩌랴 그래도 지나야 했다.
그 당시 우리 어무이가 아씨를 얼마나 미워했을꼬?
나중에 들었지만 사람들이 피하는 그 숭악한 고갯길을
아끼는 자식을 넘도록 한
그 아씨가 조건 없이 밉기만 하더란다. ㅎ
나는 그런 두려움을 떨쳐 내려고
밤길을 다니며 담배에 연신 불을 댕긴 것이다.
암튼 그렇게 시작된 담배는 결혼후엔 점차 더 늘었고
그 악마는 차츰 내 심혈관을 병들게 만들었나 보다.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 금연 맹세도 여러번 하였고
여러가지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번번히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일시에 끊으려는 시도도 해 보았고 점차 줄여 보기도 했다.
해롭다는 니코친과 타르를 더 거른다고 파이프롤 써보기도 했으며
금연패치, 금연껌, 금연침, 금연초도 써 보았으나 실패하고
결국 2005년 어느 날 뇌혈관이 터졌다.
나에게 중풍(뇌출혈: 정확한 병명은 지주막하출혈)이 온 것이다.
그 두 주전 아내와 MTB를 타고
안양천-탄천- 성남 중앙공원-안양을 거치는 장거리 라이딩을 한 뒤
그 주 휴일(국경일)엔 삼성산(관악산부근)에 올랐는가 하면
일주전 주말엔, 입사동기들 가족모임이 경주 모콘도에서 있다하여...
토요일 근무를 마친뒤 서둘러 출발하었으나
고속도로의 정체로 자정이 돼서야 겨우 도착함으로써
그때 많은 피로가 쌓였던 것 같다.
당시 모임이라 하면 먹고 마신후 필연적으로 갖는 행사가 있었는데
밤이 새도록 동양화를 감상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 유독 동양화 감상을 하지 않는 친구가 있었고
그는 옆지기들 처럼 잠까지 다 자서 친구들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현명했던 것 같다.
오랜만에 고적지를 왔으니 관광을 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밤을 세운 동양화감상팀은 마님들과 함께 그에 이끌려 다녔다.
불국사를 거쳐 첨성대... 그리고 남산까지 올랐다.
뿐만아니라 다음날 일정(청송주왕산 장군봉 등반)도 소화하였으니
지금보다 많이 젊을 때여서 가능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피로가 누적돼 포화했었는지...
그 다다음날 아침 출근 준비 중에 뇌혈관이 터진 것이다.
출근준비를 하려 세면기 수도꼭지를 여는 순간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내려친듯 깨지게 아팠다.
그런 통증은 난생 처음이었다.
뿐만아니라 머리 안이 후끈달아 올랐고 눈은 자꾸 감겼으며
토할듯이 메스꺼웠던 기억이다.
그런 가운데 정신은 멀쩡해서
눈을 감은 채 애엄마를 소리쳐 불렀고
1339 에 전화를 해 증상을 얘기하여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지 물어보라 했었다.
참고로 "1339"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의급의료정보센터이며
24시간 응급환자의 조치방법을 안내해 줌은 물론,
환자가 쉽게 갈 수 있는 가까운 병원과 약국을 안내하는곳으로
평상이 기억하고 있으면 비상시 유용하게 써 먹는다.
암튼, 아내가 전화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나의 손,발까락 끝을
바늘로 찌르고 피를 짜냈다고 한다.
1339에서는 119의 도움을 받아
속히 **대학병원으로 급히 가라고 권유를 했고,
잠시후 소방관들의 도움으로 응급실로 갔었다.
그때 처음 타 본 엠브랜스(봉고?)가 얼마나 승차감이 나쁘던지...
암튼 일찍 병원으로 갈 수 있었기에...
또한 가족들의 제 빠른 조치 덕분에 나는 살 수 있었다.
뇌 혈관이 어떤 이유로 막혀 압력이 상승하고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빵하고 터졌으면 죽었을 텐데
조금만 터져 출혈이 적은 덕분에 살았단다.
터진 부위를 혈관을 이용해 색전코일(백금실뭉치)로 막는
시술을 하였고 혈관이 다시 막히지 않도록
피를 묽게하거나 혈전이 생기지 않게 하는 약을
평생 먹어야 하는 치료를 계속 받게 됐다.
그후 퇴원하여 직장에 출근을 했는데
업무 스트레스와 나의 결단력 부족으로 병원에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말았다.( 바보 같이~)
아내로부터 구제불량이라며 잔소리는 물론
무시당하기 일쑤였음은 당연하다.
그렇게 일년이 경과한 2006년 어느날 밤
자정이 조금 지났을 무렵 내가 화장실을 다녀 오더니
손으로 가슴을 만지며
아프고 답답하다면서 중얼거리듯 호소를 하더란다.
< 나는 그때의 기억이 다 지워져 전혀기억에 없으나
나중에 옆지기로부터 들은 얘기를 쓴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옆지기는 아무래도 걱정이 됐는지
작년에 입원했던 그 병원에 문의 전화를 했었고
그 병원에서는 예후가 이상하다면서
얼른 119이 도움을 받아 응급실로 오라고 하더란다.
하여 응급차에 오른 우리는 그 병원으로 급히 이동하였고
병원 앞에서 응급실 안까지 걸어 들어 갔으며
응급실의 침대까지 걸어가 태연히 눕기까지 했단다.
의료진에 의해 내 가슴에 심전도검사 장치가 설치되는 순간
갑자기 내 심장이 멈춰서 난리가 났단다.
그날 집에 나 혼자 였다면 어찌 됐을까
지금처럼 살아 있지 못하고 저 세상에 가 있었을 거다.
암튼 사람들이 뛰어오고 가슴을 압박하며 시도한 심폐소생술,
그 덕분에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단다.
심전도 검사와 조영검사를 비롯한
관상동맥의 스텐트 시술을 받을 때까지 총 7차례나
심장이 멎었다 다시 회복되기를 반복하였는데...
그러는 동안 심장근육이 경색(죽음)이 일어나
정상적인 기능이 쇄퇴된 것이다.
참고로 인간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대부분의 세포는
스스로 재생하는 작용을 하지만
심장근육과 뇌는 재생을 하지 못하며
그런 뇌와 심장세포에는 산소와 영양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어야 한단다.
만일 혈관이 막혀 조직으로 혈액이 공급되지 않으면
조직의 일부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나의 경우 심장이 7차례나 멈췄었고
그 때마다의 심폐소생술을 실시하여 겨우고비를 넘겼지만
심장세포의 일부가 경색돼 기능이 떨어져 있단다.
심장을 동그란 공에 비유를 한다면
공을 이루는 고무의 두께가 일정해야 둥근 균형을 유지하지만
풍선처럼 약한 부분이 잘 부풀게 되고
그 곳부터 점차 조금씩 더 얇아지게 되기 마련이며
계속 반복되면 언젠가 펑크가 나는 것처럼
살아있는 내 심장도 그와 비슷하게 일부가 얇아져 있단다.
하여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에 갔을 당시
얼마나 심장이 약해졌는지 혈압이 50~90에 불과하였으며
증세는 심한 몸살후 처럼 무기력하고
어지러움의 지속되는가 하면, 금세 지치는 현상이 있었다.
심장에 무리를 주어서는 안돼며 정기적인 검사를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예후를 관찰하고 방비를 해야 한다는 거다.
암튼 시술을 받을때까지 멈춘 심장을 7차례나 살려낸 후에도
1주일간 중환자실에서 깨어자니 못하고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식물 인간으로 살았단다.
그렇고 그렇게 중환자실의 기억은 없으나
겨우 회복돼 일반병실로 이동하기 전부터 기억이 나는데...
나이 많은 수간호사 님이 나를 직접 찾아 오셨었다.
그 분은 내게 "선생님은 미라클맨(기적의사나이)입니다"
일곱번이나 심장이 멈췄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우리 병원 의료진의 노력과... 발전한 기술이 일부 작용했겠지만...
선생님의 의식과 무의식 중의 살려는 의지가
무엇보다 크게 작용한 것이고
그밖에도 선생이 반드시 살아야 하는...
이 우주의 그 무엇인가가 역활을 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지말고 살아 남으십시오.
세상을 위해 꼭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래야 의료진의 노력이 헛되지 않고
선생님과 가족이 그 보람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부디 일반 병실에가서 열심히 치료받고
건강을 회복해서 살아가길 빈다면서 배웅을 해 주셨다.
그후 지금까지 병원에 주기적으로 갔었고...
그 수간호사님을 뵐 수있기를 바랬는데...얼마후 은퇴하셨단다.
암튼 뇌출혈 때와 마찬가지로 일반병실로 올라갈 때까지
한달가량 입원치료를 받았다.
치료 중 가장 힘든 것이 가슴의 통증이었다.
통증은 6개월 이상 지속됐었다.
심장이 멈출 때마다 시행했던 심폐소생술(1000회 이상 압박)때
받은 가슴압박으로 가슴뼈가 상했기 때문이며
회복기간 동안 어쩔수 없단다.
여하튼 그 당시 느낀 것은
담배로 인한 혈관질환 환자들이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후회한들 무엇하냐는
자조섞인 한숨을 쉬어 보면서...
불구자로 남지않고 이렇게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음에 대해
옆지기를 비롯한 가족과 의료진 들에게 깊이 감사한다.
만일 돌아올 수 없는 문턱을 넘었더라면 가족은 어찌 되었을까
과연 옆지기와 아이들은 어찌 살고
가장으로서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의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면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담배피는 친구들과 그 가족들의 금연열망을 성공시키는데
내 글이 미력하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병실에서 한달 동안 있으면서 TV를 보던 중에
오토캠핑을 알았고 내게 제격일 것 같아 입문하는 계기가 됐다.
그것과 관계없이 몇개월후 직장에 복귀하였으나
역시 스트레스에 금연을 지키지 못해 무너지고 말았다.
어느 선배의 권유로 금연처방을 찾아보았던 바
챔픽스라는 약품을 발견하였고
그 약 덕분에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금연은 무우자르듯 단박에 해야 하지만...
대부분이 금단 증상으로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이약품은 금단 증상을 잊게 만들어 자연스레
금연 할수 있게 도와 준다.
약을 복용하면 담배를 피우면서도
자동적으로 서서히 줄어들고.. 쉽게 끊을 수 있다는 거다.
이 약은 약국에서 팔지만.. 반드시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 하며
약값이 담배 값 보다 비쌌던 기억이다.
담배가 리코틴 중독에 의한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습관이란다.
습관이 수시로 담배를 입에 물게 된다는 것이다.
이 약은 담배를 수시로 입에 물어야 하는 습관을
잠시 잃게 해 줌으로써 담배를 찾지 않게 해 준다는 것이다.
담배피러 옥상에 가는 버릇을 까먹게 하므로
흡연량이 신통하게 줄어 들게 되며
시일이 경과해 담배를 피지 않아도 금단현상이 약화되서
흡연자를 괴롭지 않게 하기에...
이럴 때 약간의 금연의지를 발휘하면 끊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는 먹은 약값이 아깝고...자존심을 지키려...
또는 쌓여진 금연 기록이... 무너지는 것이...
너무나도 아까워서도 급연의 가능성을 높여 준다.
금연 성공율이 70%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복용 중에도 견디기 어려우면 내키는대로 한개피 피워도 된다.
그러나 복용전의 담배 맛이 나지 않고 간절함도 덜하다.
그로인해 얼마 후 스스로
이제는 완전히 끊은 것 처럼 느껴지는 시기에 도달한다.
그렇게 금연했다고 느낄지라도
약은 두어달 더 먹어야 완전 금연에 성공한다고 한다.
나는 20일쯤 복용 후 일절 담배를 피지 않게 됐지만...
제약사의 권유대로 3개월을 복용했었다.
덕분에 30년 가까이 볼모가 됐던 담배로부터
나는 해방되었고 지금에 이른다.
암튼, 담배를 끊고 나면 모든 것이 새로와진다.
잘 낫지 않던 감기가 사라지고 사람이 깨끗해진다.
요즘세상에 담배피는 사람은 짐승이나 다름 없다며
금연을 권하는 전도사가 됐다.
그 약 덕분에 금연 9년차에 접어 들었다.
지금도 이따끔 꿈 속에 담배를 피고 깜짝 놀라곤 한다.
실제로는 담배를 입에 대지 않지만....
생명을 얻기 위한 금연을 할 수만 있다면
돈 몇푼은 아무 것 아니지 아니한가
나는 비록 담배를 일찍 끊지 못해 심장병이 생겼고
그 덕분에 시한부의 생이지만 고맙게 살고 있다.
담배로 인해 건강을 잃는다면...
돈이고 명예며 가족과 친구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지난해 소개하였지만
그때 쓰러진 친구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멀리 갔다.
http://blog.daum.net/baejery/970
이글 상단부의 경주에 함께 갔던 녀석이다.
녀석은 나의 상황을 다 알고 있고, 나의 경험을 거울삼아 금연하도록
여러번 얘기했는데도 자기는 괜찮다며 장담하고 듣지 않더니
녀석은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저만 훌쩍 떠나면 다 인가?
남은 가족의 아픔과 고통은 어떻하라구~
남은 가족들의 삶이 행복할까
그래서 그런 가정의 불행을 예방하려고~
이렇게 나의 담배 추억을 알리는 것이며...
더불어...어느 사람의 그 약을 이용한 금연후기를 소개 하니
얼른 인근 내과를 찾아가 금연처방을 받아 시작하시길,,,,
정부에서는 흡연자의 금연을 돕기위하여
성공율이 높은 챔픽스의 의료보험 적용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혹시 올해부터 적용할지도 모르겠다.
그에 관계없이 금연을 시도하는게 답이다.
여하튼, 금연에 성공하시거는 주변 흡연자에게 알려
금연을 돕는 사람이 되시기를...
~제약사와 나는 아무연관이 없음~
=> 어느 금연 시도기 : http://eaglek.com/220179568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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