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 여행기

[ 중국 ] 남경 이야기

재넘어아재 2011. 11. 10. 17:16

 

 

 

중국여행이야기

2011. 10. 26.~11. 2.

북경, 남경, 황산, 항주  남경

   

7박 8일 일정으로 중국(북경~남경~황산~항주)을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 중에서 알짜들만 모아 총4편으로 나누어 꾸몄으며

그 중에 두 번 째(10. 28.부터 ~10. 30.아침까지)로 여행한 남경 이다.

 

북경에서 이틀을 지내보니 언어소통에 문제가 있다.

이제 1000여키로 떨어진 남경에 가야하는데....

 

남경은 난징 대학살하면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도시이다.

기억도 좋지만 중국여행에 필요한 대화를 조금 익혀주자~ㅎ

함께한 동료가 작성한 자료에서 퍼 왔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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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녕하세요?  /  你好(ni hao:니 하오)

2. 감사합니다. / 谢谢(xie xie:씨에 씨에)-일반적으로../ 谢你(xie ni:씨에 니) -친구들끼리../

非常感谢你(fei chang gan xie ni:풰이 창 간 씨에 니 )-상당히 고맙다는 표현..중국 사람들은 잘 안쓰는데 외국인이 쓰면 상당히 재미 있어함. 농담식으로 써도 좋음.

 

3. 좋다/싫다. / 好(hao 하오) 가장 일반적인 좋다라는 뜻. /不好(buhao 뿌하오) 좋지 않다

4. 그렇다/아니다

是(shi 스) 그렇다(원래는 be동사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맞다라는 의미로도 씀)

不對(budui 부뚜이, 부뚜에이) 아니다.

5. 죄송합니다. / 對不起  두이부치

6. 이거 얼마에요? /这个多少钱?(zhe ge duo shao qian:쩌 거 뚜어 샤오 치엔)

7. 어디로 가야하죠?/ 怎么走(zen me zou:전 머 조우: 어떻게 가죠?)  去哪儿(qu na er:취 나 알:어디가?)

8. 좀 깎아주세요^^/ 便宜一点吧(pian yi yi dian ba:피엔 이 이 디엔 바)

9. 그게 어디에 있나요??/ 那个在哪儿?(na ge zai na er:나 거 짜이 나 알)

10. 제 이름은 ***입니다. / 我叫~~。(wo jiao ~~:워 찌아오 ~~~) 我的名字是~~~。(wo de ming zi shi ~~~:워 더 밍 쯔 스~~~)

11. 제 전화번호는 123-4567-8900입니다.

我电话号码是123-4567-8900 (wo dian hua hao ma shi~~~:워 띠엔 후아 하오 마 스~~~~)

12. 숫자

(1):yi,이 (참고로 전화번호 버스 번호 등을 이야기 할때는 '이'라고 말하지 않고 'yao:야오'라고 읽는단다.)

(2):er,얼    (3):san,싼     (4):si,쓰    (5):wu,우    (6):liu,리우    (7):qi,치 

(8):ba,빠    (9):jiu,지우   (10):shi,스

sh,zh,ch 등은 영어 r발음 하듯이 혀를 말면서 발음 한다.

shi-'스'라고 적었지만 천천이 발음하면 스을 이렇게 되는데 혀를 천천히 말아준다고 생각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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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중국 국내선 항공기를 타고 남경 공항에 도착했다.

남경공항에서 약속된 중국 회사 직원들을 만나러 나가는 길

 

 

 

남경공항에 도착했으니

남경에 대해서도 알아 보자.

아랫 글도 동료가 수고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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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은

   소주(마시는 소주 아님)로 유명한 강소성(江蘇省)의 성도며 명태조의 건국지로서 남경대학살의 아픈 역사를 지닌 역사의 도시다.

    남경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나라를 세운 곳이고, 11년간 태평천국의 도읍지였으며 근대에 들어서는 손문이 청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둔 곳이기도 하다. 훗날 남경대학살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오랜 세월의 역사를 간직한 고성으로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구시가를 둘러싼 남경성벽은 높이 13∼25m, 주위 34km에 달하며 세계 최대로 알려져 있다. 남경은 원래 소비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하였으나, 과거 약 20년간에 전통적인 견직물공업 외에 화학 ·기계 ·철강 ·식품 등 공업이 크게 일어나 강소성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해 가고 있다.

남경의 역사

   남경은 오나라부터 시작하여 명나라와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대국가의 도읍지였다. 그 계보를 보면, 오(吳)․송(宋)․양(梁)․초(楚)․동진(東晋)․송(宋)․제(齊)․양(梁)․진(陳)․당(唐)․명(明)․태평천국(太平天國) 등 수 많은 왕조와 역사가 이곳 남경을 거쳐갔다.

   또 중․일전쟁 중에는 일본군에게 점령되어 왕자오밍정권이 수립되었다가 전후 국민정부가 복귀하였으나 49년에 중국공산당에 의하여 점령되고 중국공산정권이 수립 후 강소성의 성도(省都)가 되었다.

_ _ _ _ _ _  

남경에서 업무협의를 한뒤 허락이 되면 중산릉과 영곡사를 관광하려 한다.

고속도로를 통해 남경시내로 들어서고 있다.


중국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지형으로 짐작했으나

이는 오산이고, 산이 적은 평원지역이 많았다. 전라도 평야처럼...


남경은 북경보다 훨씬 남쪽에 있는데 평활하였고

기온이 높아 강수량이 많으며 비옥한 농토 지역이라고 한다.


남경엔 북경과 달리 고가도로가 많았고

고가도로 옆엔 화초가 심겨진 화분들을 매달아 놓았으며

길거리는 플라타너스를 잘 가꾸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강변 등 곳곳에 보존되고 있는 명나라시대의 성곽,

역시 버드나무 등이 아직 파랗게 살아 있다.

그렇지만 더 있으면 눈도 오고 할 것이란다. 



그 쪽 회사 관계자들과 만나 장시간 업무협의를 가졌고

함께 식사도 하였다.


식사 때 나온 미꾸라지 요리

머리와 뼈가 제거 되었는데...

한국에서 이 요리를 하면 히트칠 것 같았다.


뼈를 제거하는 방법은 대충 알아봤는데..

나중에 한번 해 봐야 할 듯...^^



식사 후에 짐을 가지고 호텔로 가 여장을 풀고



다시 상대 회사로 갔다.

그리고 이것 저곳을 방문하였고


그에 대해 여러 설명을 들었다.



저녁 때엔 그들과 미,중 핑퐁외교 때 마셨다는 백주도 마셨다.



호텔에 도착하여 잠을 청한다.

혼자쓰기가 정말 아까워~~^^



자기 전에 밖의 풍경을 담았다.

호수와 주변의 숲이 펼쳐 있으니 아침 산책을 해도 좋을 듯



아침에 깨어나 밖을 보았다.

비는 내리지만 우산을 쓰면 문제가 없을 정도여서 밖으로 나갔다.

우비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신기 했다.



짐을 어깨에 매고 다니는 모습도 신기했다.

한국에서는 저런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어릴 때 몰동이를 진 모습은 보았지만 말이다.

생활에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듯 하다.



교통질서 의식은 부족한 편이다.

신호를 잘 지키지 않고 중앙선도 막 넘어 다닌다.


그렇지만 교통 신호체계는 마음에 들었다.

정지신호(붉은 숫자)가 언제 끝날 것인지, 좌회전 신호가 얼마나 남았는지 등등이

초단위 숫자로 표시되어 운전자에 제공하여 스트레스를 덜 받을 것 같았다.


통역에 따르면 중국 내에서 남경은

교통신호쳬계가 잘 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단다.



호수를 찾아 아침산책을 나갔다.

남경날씨는 자주 비가 오긴하지만 소나기가 내리는 경우가 적다고 한다.

비는 온난한 가운데 이슬비 처럼 조금씩 자주 내린다고...


그래서 그런지

가로수인 플라타나스가 대단히 크게 자란다.

또한 결정적으로 태풍 등 강한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한다.


호숫가에 이름모를 커다란 새가 앉아 있었다.



신기해서 찍었다.

한국의 오리보트장 처럼 관광객들에 대여를 하는 것 같다.



수상도보 어쩌구 쓴것을 보니

사람이 물 위의 저 안에 들어가 굴리듯 걷는 모양이다.

요금은 20위안(한국돈 4000원정도)



호수 들레에 나 있는 길이 1900미터라는 안내

멋있을 것 같으니 가 보자^^



수양버들 아래에 길이 나있고

숲과 건축물 모습도 보인다.



그 길 공터마다 어르신들이 모여

체조를 하신다.



혼자서 산책을 하는 이도 있었다.



친구와 사이좋게 체조하는 모습과



비를 피해 긴회랑에 둘러서서

체조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파노라마로 한컷



그냥 걷는 사람들도 많았다.

가방을 맨 모습은 어쩌면 출근하는 직장인이

공원길을 이용하는지도 모르겠다.



간편하게 비를 피하는 방법..ㅋ

비닐 봉지로 머리를 씨운다.


몇년전 갑자기 내린 폭설로 교통이 두절돼 걷던 생각이 난다.

머리에 내리는 눈과 녹아내리는 물이 앞을 가렸던 그 밤


비닐 봉지를 구해 눈 구멍을 뚫고

머리에 뒤집어 쓴채 귀가하던 그 때 생각이...



머물고 있는 호텔이 보인다.



멋 있는 공원이었다.

잘 가꿔 우거진 숲하며 호수가 잘 어울어져 있었다.



저런 주변에 사는 시민들이 부럽다.



호수옆의 작은 연못에 연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을 감샇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듯



꽃은 이미 졌지만 아름다웠을 게다.



역시 여기저기 공간에는

함께 체조하는 모습들이 즐거워 보였다.


중국정부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에 긴장을 한단다.

천안문 사태와 같은 공산당을 위해하는 사건은 모여있는 사람들이 발생시키니깐~


그래서 그런지 교회를 구경하기 힘들었다.

중국 정부가 겉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주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간접적인 방법으로 탄압을 하고 있는 듯하다.



저런 앰프(여러가지 모델이 있는 듯)를 작동시키고

음악에 맞춰 체조(춤?)를 한다.



대나무가 예쁘게 휘어 있다.

호텔로 돌아 갈 시간



메타세콰이어 종류같은데...

물속에서도 잘 나라는 수종인듯



호텔 앞으로 나왔다.

삼륜자전게에 과일과 채소를 싣고 다니며 파는 아짐의 모습이다.


그 옆에 빨강색과 곤색 우비를 입은 두 여인이 지나가고 있다.

중국의 거리에는 자전거도 많고 전기오토바이도 많았다.

전기오토바이는 충전식 자전거라고 하는게 더 어울리듯 하지만...^^



가이드를 만난다.

하나투어와 연결돼 소개받은 연변출신 박창호 선생...

박식하고 매우 친절했다.



난징(남경)대학살기념관을 가기로 계획돼 있다.


난징대학살

일본에 붙들려 가 있던 우리민족이 관동대지진때 무참히 학살되었던과 비슷하게 

청일전쟁시 중국에 진출했던 일본군이 당시 수도 난징일대에서 민간인등 무려 30만명을 학살한 사건이라고 한다.  일본군은 부녀자를 간강하거나 이유없이 무참하게 살육하였기에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가슴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그 현장에 기념관을 세운 것이다.

 

 기념관 입구에 늘어선 조각상

학살 당시의 가족들의 모습이나 처참한 마음을 나타냈으리라... 

 

 

아침부터 기념관을 입장하기 위해 늘어선 관람객들

 

 

우리나라 사람들 처럼 중국인들도 일본인들을 좋아할 이유가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3.1절이나 광복절 언론에서

학교나 독립기념관 같은 곳을 통해서 일본인들의 만행을 규탄하여

조상들의 아픔을 가슴에 새기듯이 중국도 기념관을 만든 것이리라. 

 

 

 

관람비가 무료인 것은 좋으나

개방시간을 당겨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거나 짜증내는 법없이

기다리는 것을 보면 중국인들 특유의 끈기와 순종의 여유를 엿볼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거나 짜증내는 법없이

기다리는 것을 보면 중국인들 특유의 끈기와 순종의 여유를 엿볼수 있다.

 

 

중국은 일본의 난징대학살 기념과 곳곳에 역사를 잊지말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으며 조난자 30만명을 강조하여 매우 숙연하게 만들었다

 

 

관람객을 계속 입장시키지 않고

텀을두고 무리지어 입장을 시키고 있었는데...노하우가 있나보다.

 

 

내부는 촬영금지라해서 제대로 찍지 못했다.

목에 건 카메라 삿터를 감각으로 슬쩍 누르는 방법으로 찍은게 있으나

잘 찍힐리 만무하지만....애교로 봐줬으면 좋겠다.  

 

 

여러가지 상황설명

옛 사진 문서, 물건 등을 전시하였고

 

 

증언들을 기록해 좋기도 하였으며

 

 

이나 그림들도 전시돼 있었다.

 

 

당시 중국의 무기와

 

 

일본군인들의 무기를 전시해 비교할 수 있었는데.

 

 

아무리 장사라도 맨손으로 칼을 당할 수 없으며

칼로 총을 당할 수 가 없어서 그리 많은 희생자를 냈을 것 같았다. 

 

 

발굴된 각종 유해인 뼈와 해골을 모아 전시해 놓았는데...

마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연상시켰다.

 

그들이 우리의 아버지 할머니라고 여겨보면,

한국인인 나의 피가 끓는데...중국인들은 오죽하겠는가 싶다.

그런 것을 일본 관광객이 보았다면 두려움이 있을지도. 

 

 

유해 발굴현장에 그대로 건물을 지어

기념관을 세운 듯 했다.

 

 

유리로 덮어 보관한 것을 보면

진품일 것이라는 믿음이 가기도 했다. 

 

 

30만명의 이름 등 프로필을 일일이 적어 보관하고 있었다.

밖에는 성화처럼 불이 계속 타오르고...

 

 

평화를 갈구한다는 의미로 평화공원이 기념관 뒷편에 조성되 있었다. 

공원인근 도로에서 버스에 올랐다.  

 

 

이젠 중산릉을 갈 차례

도심의 길 옆 건물에 빨간색 글씨가 있어 무엇인지 가이드에게 물어봤다.

 

미용실인 줄 알았는데  그곳은 남자들의 이발소란다.

참고로 중국에는 여성들의 미용실이 없다고 해서 의외였다.

 

 

가이드인 창호씨가 중산릉에 대해 설명을 했으나

예습한 것을 잠시 읽고 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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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릉]

남경의 동쪽, 환중산에 위치한 손중산선생이 묻혀 있는 곳이다.

흔히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문의 호인 중산(中山)이라는 이름을 붙여 지은 곳으로, 위대한 민주혁명의 선두자 손중산선생이 이곳에 잠들어 있으며, 중산릉은 그로써 중요한 역사적, 정치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곳은 1926년부터 1929년의 약 3년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넓이가 6.6km, 길이가 7km로 총 면적이 20여 평방km에 이른다. 지리적으로는 아열대북온대에 속해 있어서 사계절이 분명하고 기온이 적당하다. 연평균 강수량은 900-1000mm, 평균기온은 15.7도이상으로 강소성에서 제일 큰 삼림공원이기도 하다.

 

또 이곳은 한 사람의 묘라는 것을 잊게 할 만큼 주변 자연조건과 경관이 뛰어나 200여군데의 볼거리들이 있고, 600여종의 자연식물들과 어울러져 자연미와 인공미가 조화된 여행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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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릉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 도보여행하기 나쁜 날씨

 

 

 

중산릉 이곳저곳을 다니는 내부 이동차랑을 이용하기로 했다.

 

 

플라타너스는 남경의 특색인 것 같다.

본체 줄기 중간에서 2~4개의 가지가 뻗어 나간게 특색

 

 

중산릉에 가까우면 큰 히말라야시다가 심어져 있다.

뿌리가 약해 바람에 잘쓰러지는 것을

삼각파이프를 매달아 보강한 듯하다.

 

 

계단 앞에 도달했다.

 

 

손중산의 묘가 보인다.

손중산이 묻혀있는 중산릉에 대해서도 예습한 것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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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릉의 앞에는 커다란 반월형의 광장이 있고, 광장에 손중산의 동상에 서있다. 또 중산릉으로 오르는 참배로의 계단은 392개 계단 도중에는 금빛의 단지가 장식되어 있다. 계단을 다 오르면 제단이 있고 그 뒤에 묘설이 있다. 묘실에는 손문의 와상이 안치되어 있고, 지하에는 관이 안치되어 있다.

1925년 3월, 국민혁명이 한창일때 북경에서 손문이 객사한 뒤인 1927년 6월, 손문의 장례가 국민정부 치하의 남경에서 국장으로 행하여지고, 이곳 남경 교외 자금산록에 그 유체를 매장하였다. 국민정권은 대만으로 옮긴 뒤, 대북에 중산릉을 만들었으나 그 곳은 물론 진짜가 아니며, 이곳 남경중산릉이 진짜 손문선생의 묘이다.

손중산(孫中山)에 대하여...

이름은 일선이고, 호는 중산이다. 공화제의 창시자로 국민정부시대에는 나라의 아버지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광동성의 향산(현재의 中川)이라는 곳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4세 때 하와이의 형에게 가서 호놀룰루의 신교계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8세 때 귀국하여 세례를 받고 홍콩의 서의서원을 졸업(1892)한 뒤 마카오․광주 등에서 개업하였다.

삼합회(三合會)의 수령인 정사량과 알게 되었으며, 홍콩 의학교 재학때부터 반청운동(反靑運動)에 참가하였다. 중국을 서양으로부터 개혁하려고 한 그는 포르투칼의 영지인 마카오에서 쫓겨난 뒤부터 본격적인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때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한 뒤 이듬해 10월 광주에서 거병하였으나 실패하고 1896년에는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으나 그곳에서도 청국공사관에게 체포되었고, 그때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견문을 넓힌 그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구상하였다.

그 뒤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동경에서의 유학생 등 혁명세력을 통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반청무장봉기를 되풀이했다. 1911년 10월 미국에서 신해혁명의 발발 사실을 알고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임시 대총통(大總統)에 추대되어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얼마 후 북부의 군벌들과 타협하여 정권을 원세계에게 넘겨 주었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러시아혁명을 본받아 국민당을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 노동자․농민과의 결속을 꾀하였다. 그리고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하여 북벌을 꾀하였으나,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북경에서 객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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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묘지를 오르고 있으나

별 감흥 없이 이끌려 갔다.


묘지같은 숙연함도 없고 공원 같은 이미지였다.

 


중국인들도 그져 올라왔다가 사진 몇장찍고 내려가는 듯 했다



손중산 상


 

중산릉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가 시원했다..

유명한 곳이어서 그런지 관광객(참배객?)은 많았다.

 

 

순환 버스 주차장으로 다시 내려 왔다.

영곡사로 가는 버스를 기다릴 차례

 

 

 

공원내에서는 다른차량은 통행금지라 한다.

전기로 움직이는 저 순환버스를 이용해야 한단다.

요금이 꾀 비쌌던 것으로 기억된다.

 

 

순환버스의 젤 뒷좌석은 뒷방향을 향해있었다.

그 곳에 앉았으니 중산릉과 멀어지는 모습의 사진이 되겠다.

 

 

 

가끔횡단보도가 있었으며

순환 버스도 그곳은 정차해야 한다.

한국인 같아서 찰칵...^^

 

영곡사 입구에 도착했다.

 

 

우산을 쓰고 가야할 정도로 비가 내렸다.

가이드가 영곡사에 대해 설명을 해 주지만 다 잊었다.

그러니 복습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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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곡사]

영곡사는 수려한 산세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종산풍경중에 제일로 꼽히며, 그 중에서도 무량전과 영곡탑은 이곳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무량전은 1381년에 이곳으로 사원 전체가 옮겨졌을때 같이 옮겨온 것으로 높이가 22m, 넓이가 53.8m이다. 다른 사원에도 무량전이 많이 있지만 이것은 중국에 현존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큰 무량전이다.

또한 영곡탑은 영곡사 뒷쪽에 있는 높이 60m, 9층8면의 동탑이다. 1929년 중산릉의 주요한 공정이 완공된 후에 영곡사 뒷편에 개혁기념탑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영곡탑이다. 또 탑속에 계단이 있어서 정상까지 오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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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부는 비가 참 많은 곳같았다.

 

이어 도착한 곳이 무량전

무량전이란 기둥이 없이 지어진 건축물을 말한단다.

굴도 포함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보고 있는 것은 굴에 가깝다.

 

우리나라의 석굴암도 무량전 범주에 속하겠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이름이 비슷~~^^

암튼 그 곳에는 중국 근대의 역사적 인물들을 묘사해 놓았다.

손문, 즉 손중손이란다.

 

서태후

 

무량전을 나서자 나타나는 영곡사

크지는 않았지만 보통의 우리나라 절처럼 아담해 보였다.

그 안에는 대형 향불을 판매하는데...

불을 피우며 소원을 빌면 성취할수 있단다.

 

밖에는 무슨 기둥처럼 탑이 서 있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경내가 넓지 않아 둘러보는데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비는 계속되었다.

  

영곡사 입구 연못가

빗속에 분홍색 꽃이 이뻐보였다.

 

 

예약돼 있는 식당으로 가 점심식사를 하러 간다.

중국식당들은 참 크기도 하다.

웬만하면 개업하기도 힘들만큼이나.....

그래서 그런지 호텔과 겸업을 하는 곳도 많은 듯

 

 

내부는 모던한 양식 디자인이어서 색다른 느낌을 주지만...

손님은 별루 없었다.

 

 

점심식사를 한 다음, 황산으로 가기위해

그 입구 부근인 항주로 이동한단다.

 

버스로 3시간 30분가량 걸리는 긴거리를....

황산행 케이블카를 타는데까지 버스가 갈수 있으며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황산을 도보로 등산을 한후 

정상에 있는 호텔에서 투숙을 한단다.

 

따라서 간편한 등산차림을 하되

필요한 물건을 최소화해 배낭에 넣고 다녀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카메라만 해도 한짐인데 걱정이 되지만

달앙 랜즈 두개와 쌍안경, 그리고 압축자켓과 방한복을 생각 했다.

버스 속의 시계는 15시 1분을 가르키고...

 

한시간 쯤 더 달렸을까

비가 내리는 관계로 밖은 잘 보이지 않고

보인다 하더라도 안개에 싸여 잘 보이지도 않는다.


가끔가끔 안개사이로 뿌옇게 조금씩 보이는

중국의 농촌모습은 한국의 여느 곳과 아주 흡사했다.


다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부요한 느낌이 들었는데 한국의 90년대 느낌이랄까?


어떤 곳은 한국의 보통 농촌보다 더 잘사는 기분도 들었다.

큼직한 2층집들이 띠엄띠엄 짓고 사는 그들은 자유로왔으며

우리가 알고 있던 그런 공산국가가 아니었다.


한참만에 정차한 곳은 고속도로 휴게소

중국의 고속도로가 모두 그런 것은 어니겠지만

차량이 많지 않았다.


화장실은 우리가 듣던것과 다르게

우리네 화장실과 같이 대부분 개량돼 있었다.

물론 시골로 들어가면 그렇지 않겠지만...^^


편이점도 있으니 가 보자.

정차된 차량도 몇대 되지 않았듯이

통행량괴 비슷하게 휴게소의 편이점 규모도 작고

손님이 우리뿐이다.



작지만 깨끗히 꾸며져 있었다.

혹시나 싶어 백주와 안주거리를 샀다.

등산가면서 팩소주 사 가듯이 경제적으로 여행하려고...ㅋ



중국인들은 과장을 좋아하는 것 같다.

포장을 왜 그리 크게 하는지..

일하는 점원 아가씨는 환히 미소를 지어준다. ^^



중간에 두번 째 들른 휴게소..



휴게소를 거쳐 항주로 가던중

고속도로에 큰 사고가 나 폐쇄되었다며

어느 인터체인지를 통해 막무가내로 국도로 나가라 했다.


운전자는 아무런 불만도 거부도 않은체 국도로 빠녀나온다.

국도를 이용한 관계로 시간은 30여분 더 걸렸나 보다.

중국인들은 통제에는 순응하는 것으로 길들여져 있는 것 같다.


황산입구 인근의 예약된 호텔에 도착



짐을 풀었지만..

역시 혼자쓰기 아까울 정도다.



새로 지어진듯 했다.

기념으로 화장실도 찍고...



식사전 밖에나와 호텔 전경을 뒤로하고

찰칵 인증샷을 남겼다.



호텔안에 식당과 술집이 있었다.

관광객을 상대로 할테니 값이 비싼 것은 당근이라한다.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는 일

중국사람들이 보통 먹는 그런 음식을 팔겠지만...

우리 눈에는 한식집이 아니라 중국집으로 보인다.ㅋ



오늘도 무사히 여행한 것에 감사하며

그리고 내일의 황산날씨가 좋기를...위하여~~^^



식사후 잠시 주변 관광에 나섰다.

식품점에 가서 유명한 녹차구경도 하고...어떤이는 담배를 사기도 하였다.

고사리며 죽순말린 것들도 있었다.



공예품 가게도 갔었는데...

값비싼 고급 벼루들, 나무뿌리 공예품들이 즐비 했다.


마켓에 들러 황산서 사용할

비품을 약간 구입한후 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호텔을 나섰다.

각자 간편복을 입고 배낭을 짊어지고서....


나는 베낭에 카메라와 배터리, 구스자켓 등으로 최소화하고

방한복을 걸치고 출발한다.


아래사진을 황산입구고 가는 길에 있는

오리나라로 치면 콘도 비슷한 시설 같았다.



황산편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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