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 ] 추석 연휴 나들이
[ 당진 ] 내 생애 가장 긴 연휴였다
< 2017. 10. 4. ~ 10. 7. >
글을 진작에 준비해 놓구선 깜빡 올리지 않은 게 발견되었다.
늦었지만 그때를 회상하며 올려본다.
내 생애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만 같은
공식적인 긴 연휴를 지내고 있다.
- 10. 4. 수요일 -
유년시기 고향에선 명절 아침이면 아버지를 따라
형제들과 큰 집에 내려가 차례를 지냈었다.
어느집이나 그러하듯 차례의 순서는
조상 중 가장 서열이 높은 할아버지부터 올려지며
지금의 경우 세 군데 일가에서 차례를 올린뒤
그후 십리밖 선산에 성묘를 다녀오는 순서로 명절을 지낸다.
아버지 4형제께선 돌아가신지 오래됐고
이제 큰 집 자체도 장조카를 따라 서울로 이사해 진작부터 빈집이며,
큰 작은아버지 내외도 아들들이 사는 대전에 사시다가
10여년 전 돌아 가셨기에
고향에서 비교적 가까운 사촌형들은
대전에서 먼저 차례를 지낸뒤 우리가 있는 고향으로 출발하며
도착 뒤 함께 차례를 올린다.
그 시간에 맞춰 큰 집 뒷편 길을 지나
육촌 형님댁으로 가는 길,
담벼락 틈으로 뻗은 꽃대에
부전나비 한 마리가 외롭게 앉아있다.
왜 오늘은 글을 쓰는 이 순간 허공에 있는 저 나비 처럼
쓸쓸한 생각부터 드는 것인지...
작은집에 들러 가면서 찍은 마당의 예쁜 꽃사진을 보고서야...
쓸쓸함을 조금 비워 낼 수 있었다.
하여간 작은집 사촌 식구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눴고
그들과 합세하여 6촌형님 댁으로 향했다.
작은 집에서 250미터 쯤 더 가야 6촌형님댁,
작은 집 대문을 나서자 담 옆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어릴 때 한 살 아래 사촌과 저 나무에 자주 올랐는데..
그때마다 작은아버지께 발견되어
위험하다며 혼이 나곤 했었다.
그나무는 이젠 썪은 가지도 생겨났고...많이 늙었다.
우영이네 집 앞부터 향기로운 꽃이 지천이다.
우리 어릴 땐 선생님이 나누어 준 코스모스를 씨를 가꿔
길가에는 코스모스 뿐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농촌도
도시의 공원처럼 가꿔 놓아 보기 좋아진 것 같네...
마을 이장이 열심히 일 하겠지만 주민들이 생각 그 자체가
예전보다 여유로와 진 것이 분명하다.
6촌 형님댁에 도착하자
유난히 진한 핑크빛 구절초가 우리 일행을 맞아 주었고,
안보이던 키 큰 꽃까지 인사를 한다.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가족들이 모인 자리,
끝으로 대전 사촌형님들도 도착하고 정중히 차례가 모셔졌다.
이어 날망에 있는 우리집으로 이동해 차례가 올려졌으며
그다음 마지막으로 작은집으로 이동했다.
육촌형님댁에서 그집 조카가 개미취라 했던 꽃이
작은집에도 있었다.
어? 이거 개미취 아니잖아~ 하고 내가 말했지만
조카는 계속 개미취라 주장하며 산에 가면 많다고 했었다.
사실 지난 얘기지만 당진집으로 귀가 할 때
같은 꽃 몇 포기를 얻어
죽향골에 갖다 심고서 검색해 보니
개미취가 아니라 각시취였다는...그러면 그렇지..ㅎ
하여튼 형수님~ 제가 매년 추석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작은집 마당은 누가 봐도 정말 일품입니다.
그러나 형수는, 내가 심고 가꾼 것이 아녀~
저절로 나서 자라는겨~ 하신다.
형수님은 씨를 받아 놓았다가 설 때 주겠노라
내게 약속을 하셨다는...^^
선산에 석묘를 다녀 온 후
우리 부부는 부랴부랴 고향집을 떠나야 했다.
처제들과 약속한데로
계룡시 요양원으로 장인장모를 뵈러 갔고,
이쩔 수 없이 요양원 신세를 져야하는 현실을
가슴 속 한 구석에 묻어야 했다.
내가 이토록 속상한데 아내를 비롯한
처가식구들은 오죽하랴 싶었다.
그들을 요양원에 두고 떠나야 하는 것처럼
나도 그와 같은 현실이 우리에게도 닥칠 터인데 하면서
뒤돌아서야만 했다.
그들을 만나면 반갑다는 생각보다
측은함과 서글픔부터 진하게 베어 나오는 걸 어쩌랴.
그런 무거운 발걸음으로 요양원에서 나온 우리는
두 처제 부부와 죽향골로 향했다.
연휴중 3일간 고속도로는 통행료가 무료여서일까
주차장이 따로 없는 지경이다.
그것 참, 그래도 참으며 가야지 별 수 없다.
우리 생애에 다시 없을 것 같은 연휴인데 그냥 보내긴 아깝잖아~
그나마, 공주분기점 쯤에서 정체가 조금은 풀렸었나?
여튼 죽향골에 도착해 몸을 풀었다.
- 10. 5. 목요일 -
처제들은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공세리성당을 가고 싶댄다.
가톨릭 가정인 두 처제네가
지난번 처가 형제들과 죽향골을 방문했을 때
이미 솔뫼 성지를 방문한 터였기에
이번에는 가고 싶다는 공세리를 향해 출발했다.
나는 무늬만 성당 냄새를 풍기지만...
아내 자매들은 진정 자녀답게 활동하는 사람들...
그래서 공세리에 더 감동하는 것 같다.
예전엔 바닷길이 아주 근접했던 장소였다는 이곳,
지금은 대부분 농지로 변화됐나 보다.
주차장이 가득차 겨우 주차 할 정도인 것을 보면..
연휴를 이용한 순례객들이 제법 많은 것 같다.
성지라 하면 박해시대 때 천주교신자들이 사형을 당한 장소다.
예전엔 성당을 다니는 신자가 주로 순례하는 장소였으나
근래엔 신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더 많이 찾는
유명 관광지가 된 듯한 분위기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상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 지나가는 이들을 일반인으로 보면
거의 틀림이 없다는...,
오롯이 하느님만 보시고 계시는 수녀님들...
그들도 인간인지라 성당 둘레를 운동삼아 걷는 듯하다.
그의 손엔 묵주가 꼭 쥐어져 있을 게고,
무엇인가 누구를 위해서 든지 그 발자국 마다 기원을 드릴거다.
그런 간절함으로 속세를 놓은 사람들...
신부님, 수녀님, 수사님들이 그들이라 느껴진다.
공세리 성당 그 측면을 본다.
붉은색 벽돌과 회색계 구운 벽돌에 메지는 베이지색 계통
당시 신자들이 주변 흙을 채취해 만들었지 싶다.
공세리 성당는 1895년 6월양촌성당(陽村本堂, 구합덕성당의 전신)에서
분리돼 창설되었다고 설명돼 있고,
공세리란 명칭은 조선시대 충청도 서남부의 백성에게
거둬들인 재물(조세)을 보관하던 공세창(貢稅倉)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충청도 내포(內浦) 지역에 위치한 공세리 일대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에 이미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었다.
이 후 박해기를 거치면서도 신앙을 보존하던 이 지역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에는 양촌본당의 관할 아래 있다가
1895년 6월드비즈(Devise, 成一論) 신부가
공세리로 부임하면서 본당이 설립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드비즈 신부는
이미 매입한 10칸 정도의 기와집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꾸몄고,
1897년 6월에는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공세창이 있던 일대를 매입한 다음,
1899년 그 자리에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또 1905년에는 조성학당(1927년 폐쇄)을 세워 교육 사업에도 앞장서
공세리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편 1920년대 들어 신자수가 증가하자
기존의 성당으로는 늘어나는 신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지휘 감독하여
1922년 9월에 현재의 고딕 양식의 서양식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고 그후에도 건물이 증축된 것으로 전한다. (펌)
1801년의 신유박해부터 1873년 병인박해가 끝날 때까지
박해를 받아 돌아가신 순교자 32위 묘지 앞에 서서...
자매들은 잠시 기도를 드린다.
아내와 5년 전 이곳을 다녀가며
단풍무렵에 다시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오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찾았으나
이번에도 역시 단풍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서
다음 여정을 이으려 이동한다. .
외암민속마을로 가는 길, 그 길도 험란하기만 하지만
그래도 집에서 TV만 불 순 없지 않은가
이제 외암민속마을이
불과 1.8Km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걸어 가는 게 나을 것 같은 차량 속도..
그런 끝에 결국 입구에 닿았다.
나는 네번째 방문 하는 것 같구먼...
재미있게 관람하는 방법 제1번, 입장권사는 것부터 시작했다.
외암마을의 일부 가옥들은 사유재산이라는 말씀
그렇지만 사는데 다소의 제약이 따를 것으로 생각 됐었다.
장승에 대한 이해
기와 무늬 곁에 단풍이 보였다.
마당에 외줄이 설치돼 있어
지나는 사람마다 한 번씩은 시도를 한다는...
다름 사람은 몰라도 저 여인은 성공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잠시후 발라당 넘어질 뻔 하였고...
오가가 발동하여 방향을 바꾸어 다시 도전해 보지만
역시 몇걸음 가지 못하더라는... 그렇지만 시도는 좋았어...ㅎ
글 읽는 모습의 우아한 여인...
우리가 살던 옛집의 모양들을 재현해 놓았다.
무자위(수차), 낮은 곳의 물을
보다 높은 논밭으로 퍼 올리는 농기구라 설명돼 있다.
초등학교 다닐적 둠벙 같은데 있었다.
작대기를 짚고 계단처럼 생기는 저기에 올라서 밟으면
그때마다 물에 잠겨있던 부분이 한칸씩 회전하며
물을 물레방아 수차처럼 반대편으로 퍼 올리는 방법이다.
민속마을에 가면 눈에 익은 물건들을 보며
옛날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시절에는 흔히 썼지만
지금은 없는 추억의 농기구 같은 것들을 마음껏 본다.
우리 시절의 것 보다 더 오래전의 물건도 있는 듯....
비슷하지만 처음 보는 물건들도 보인다.
고염나무, 감나무는 저나무에 접을 붙힌다는...
에전엔 저런 고염을 따 부단지에 보관해 놓았다가
추운 겨울밤 간식으로 먹었던 기억...
꿀처럼 농익은 고염을 떠다 주시던
그 어머니를 은근히 생각나게 하는 바로 그 고염나무다.
감이 붉게 익는 계절에 웬 능소화?
벼이삭이 영글어 고개를 잔득 숙였다.
벌써 점심 때를 한참 지나쳤다.
미을안 주변 어디에 한식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 기억...
식사를 하려고 했으나 보이지 않는다.
그냥 돌담길을 둘러보다
마을 입구의 저작거리로 나가 식사를 하기로 했다.
구절초가 한창이다.
붉은 유홍초가그집앞 담장을 감싸 안고....
아까 능소화처럼 가을에 웬 개나리?
마지막 여정으로 도고 또는 덕산온천으로
이동해 피로를 푸는 것으로 계획했느나 도로정체로 취소됐고,
여하튼 그렇게 연휴의 여정을 마치고
두 처제네는 귀가 하였으며 김장 때 다시이기로 했다.
- 10. 7. 토요일 -
이번 연휴의 종반을 맞았다.
이번 귀성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배추잎 눌러주기(잎 펼쳐주기)다.
잎을 놀러주면(심지어 깔고 앉아도 된다는..)
속 알이 훨씬 실하게 잘 차오른다기에 그 작업을 하였다.
아무래도 잎을 펼쳐주면 태양광을 많이 받을 것 같고
가운데 속이 자극을 받아 그런다는 것 같다.
어떤 것은 달팽이가 짓 이겨 놓았다. ㅜㅜ
ㄱ그것 참, 니들 한번 해보겠다는 거여?
달팽이약을 더 놓아야 했다.
저 배추가 잘자라 줘야
죽향골에 모여 무리없이 합동 김장행사를 할 수있다.
그러러면 적절히 물을 줘야 한다는....
그렇게 긴 추석 연휴가 지나간다.
^L^